할머니의 포도주
숲의 귀퉁이가 타는 냄새. 나무에 꽂혀있는 이파리들이 이슬을 한 움큼 뱉어냈다. 이곳저곳 물웅덩이가 여인의 눈에 담겨 연한 핑크빛 광채를 띠었다.
Truth
숲의 옆길이 열렸다.
아스라한 저녁빛의 자취를 쫓아 숲을 헤치고 들어선 무언가는, 여인과 내가 서있는 곳으로 부리나케 네발로 뛰어들어와 땅에 고인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앙상하고 흰 뼈. 머리뼈의 절반은 사라졌고 코 아래의 턱만 간신히 남아있었다. 늑골과 장골은 부서져있었고, 종아리뼈도 곧 부서질 듯 왜소했다. 상완을 이루는 뼈는 매우 단단했다. 어디서부터 기어 온 것일까. 왜 이리도 갈증이 났을까. ‘뼈’는 여인의 앞에 엎드렸다.
허헝헝!
’뼈’는 허공을 향해 빈 소리를 내고는, 자기 꼬리를 좇는 강아지처럼, 두어 번 원을 그리며 돌았다.
들이킨 물은 늑골 사이로 흘러내려, ‘뼈’의 앙상한 그림자 아래 고였다. ’뼈’는 헝헝, 울며 다시 물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가 들이킨 물은 부서진 뼛조각들을 쓸어내려, ‘뼈’는 점점 얇아지고 쇠약해져 갔다.
피치치치치-
일제히 새 떼들이 날아오르는 진동.
‘뼈’는 하악골을 벌린 채, 계속 빙글빙글 돌다가, 물을 들이켰다. 뼛조각들이 씻겨 내려가면, 다시 빙글빙글 돌았다.
여인의 눈은 녹빛이 돌았다가 이내 자줏빛으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쏴아아- 치이… 이슬이 여인의 등허리에 한차례 쏟아져내렸다. 여인은 ‘뼈‘를, 점멸하는 연둣빛 눈동자로 응시하다가 풀썩,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나는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 연신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날카로운 소리는 푸른 노을에 섞여 하얗게 부서졌다. 손끝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무릎을 꿇고 헛구역질을 하는 사이, 숲이 한차례 크게 진동하자, 사방을 감싸고 있던 빙벽이 부서져 내렸다. 숲 속의 모든 날 것들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키 큰 나무들 사이 얼어있던 얼음그물이 사라졌다.
뉘엿뉘엿, 하늘 중앙에 걸린 파랗고 비린내가 끼치는 해.
파랗게 얼어붙은 지옥의 한낮은, 서서히 해 질 녘의 바닷속으로 녹아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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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달리고 또 달렸다. 포도 봉봉의 맛. 입술을 너무 깨물었는지 피비린내가 났다.
남자는 입가를 닦으며 달리고, 또 달렸다. 달동네의 비탈길은 잔뜩 얼어 미끄러웠고, 어느 길로 올라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계속 미끄러져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결박당한 다리는 처음부터 달리고 있지 않았다. 입가에 묻은 핏빛 음료를 훔쳐 닦지도 못했다.
더운 여름이었고, 할머니의 수레에는 잔뜩 무거운 짐이 짊어져있었기에, 남자는 짐을 나누어 옮겨주었을 뿐이다.
주홍빛 한낮의 열기가 견디기 어려웠다.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음료. 평소에 단 것은 입에도 대지 않는데. 동생에게 주려했는데. 너무 더웠을 뿐인데.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할머니가 건네준 포도 봉봉을.
사방으로 자줏빛이 튀었다. 남자의 삶을 지탱하던 다리뼈가 툭 떨어졌다.
온통 자줏빛 추위뿐이었다. 토독토독, 뜨거움은 PVC 비닐에 떨어져 엉겨갔다.
남자는 동생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썼다.
꾸깃꾸깃 모아두었던, 주황색 오천 원짜리 지폐들이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동생을 위해 산 연둣빛 목도리도 물들었다.
동생과 함께 기르던 강아지가 빙글빙글 꼬리를 물며 돌았다. 그 해 여름은 유독 더웠다. 강아지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 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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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어가는 푸른 오후.
숲은 우리를 맑고 얕은 물가로 게워냈다. 여러 차례 진동하던 숲은 뒤로 바짝 물러나 하얀 가지들만 보여주며, 굳게 입구를 닫고선 내부를 보여주지 않았다.
부서져가던 ‘뼈’는 말쑥해져 있었다. 여인의 자줏빛 열꽃은 더 진해지며, 열기를 뿜고 있었다. 여인의 몸이 계속 가냘퍼지자, 여인은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뼈’를 올려다보았다. 순간 맑고 부드러운 파도가 들이쳤다. ‘뼈’는 흔들림 없이 파도를 마주했지만, 여인은 다시 힘겹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번쩍, 여인의 몸에 새겨진 열꽃이 빛났다.
파도가 지난 후, ’뼈‘는 피와 살을 되찾았다. 하지만, 눈이 없었다. 여인은 힘겹게 입을 뗐다.
“있잖아… 내가… 그 지겨운 얼음밭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어. “
여인은 남자를 올려다보며, 이제야 알았다는 듯 연신 깔깔깔 웃었다. 남자를 가리키며, 너도, 너도, 너도, 라면서. 그녀의 눈동자는 적녹을 오가며 점멸했다. 여인은 실성한 듯이 웃어댔다. 웃다가, 손가락질하다가, 비명을 지르다가, 고통에 침묵하다가 다시 경련하며 웃어댔다.
여인은 적의와 쾌락을 동시에 느끼는 표정을 지으며, 성큼성큼 일어나 걸어왔다. 그리고서는 내 어깨를 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열꽃들과 눈동자가 어지럽게 점멸했다.
“이 귀머거리 말 못 하는 병신아!!! 너는… 볼 수는 있잖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말을 해보란 말이야!!! 왜 하필!! 왜!!!”
엉망진창으로 울부짖는 여인에게 붙잡힌 나는 반항 않고 맥없이 흔들렸다.
여인이 아연실색하며 손에 힘을 풀고 주저앉을 때, 푸른 해가 일렁이며 커졌다. 여인의 적안은 햇빛에 덮여, 보랏빛이 되었다. 푸른 해는 갑자기 풀썩 주저앉아 드넓은 대양이 되었다. 습기를 머금은 부드러운 해풍이 불었다.
여인은 엉엉 울었다. 얕고 따스한 해변가. 찰박, 찰박. 파도가 부드럽게 들이쳤다. 여인의 몸은 점점 작아졌다. 자줏빛으로 점멸하던 열꽃은 바다로 흘러들어 가, 타오르더니 하늘로 치솟아 소멸되었다. 여인의 울음소리를 먹은 파도는 다시 저 멀리 밀려나 춤을 추다가 밀려오기를 반복하였다. 여인은 그 파도에 몸을 내맡기며 붉은 숨을 토하며 울었다.
소녀는 자신의 오른쪽 눈을 뽑아 남자의 텅 빈 얼굴에 흘려 넣었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끼룩끼룩. 갈매기가 나는 소리. 남자의 눈에는 저 멀리 우뚝 서서 흔들리지 않는 바위섬들이 보였다. 남자의 눈은 에메랄드 빛으로 찬란히 빛났다.
이제 가자.
소녀가 눈을 비비자, 금빛 눈물이 흩어졌다.
빼앗기지 않는 곳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보이지 않아도 괜찮은 곳으로.
나는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남자는 바다의 윤슬에 풀려 유영하며 흘러갔다. 소녀는 해풍에 실려 춤을 추었다.
그들은 이내 장밋빛 포말로 부서져 증발했다.
푸르고 비린 저녁이 찾아왔다. 저녁의 해수면은 점점 낮아지며 저물어가고 있었다.
안녕.
너를 기다렸어. 걱정 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어.
그래서 슬프구나. 왜 이렇게 빨리 왔니.
네가 춤추는 것을 딱 한번 봤어. 여기에서… 그리고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됐어.
너를 계속 쫓아갔었어…
이렇게 다 망가진 채 나타나서 미안해. 오빠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