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포도주
숲은 진동을 멈췄다. 여러 번 진동하며 물에 젖은 장미향을 내던 숲은 겨우 잠잠해졌다.
검푸른 정오의 숲이 다시 기워지며, 눈보라가 멎었다.
여인의 다리가 풀숲을 헤치며 드러났다. 희고 매끈한 피부. 그렇게나 격한 춤을 추며 설원의 끝에서 숲까지 달음질쳐왔음에도 발 끝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여인의 허벅지에 돋아난 꽃 모양의 반점은 형형한 핑크빛이 되었다가 눅눅한 적갈색으로 내려앉으며 요동치고 있었다. 사박사박. 여인의 발은 젖은 풀을 밟으며 싱그럽게 빛났다.
나는 잠자코 그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앳된 얼굴에 키는 꽤 컸다. 여인의 얼굴 너머로 숲 너머 설원의 끝이 보였다.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보였을까. 늑대들이 너무 탐을 내고 있어서였나, 혹은 내가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아서 그랬을까.
"눈은... 보이는 거죠?"
여인은 손짓으로 귀와 입을 가리키며 X자를 그리면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내리고 숨을 죽였다. 앞으로 얼마나 이런 자들을 만나야 하는 것인가.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이곳에서 나는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가야세의 호각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는다. 그는 분명히 나를 찾아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망토 말이에요. 당신은 아까 그 망토한테 휘감겼어야 해요."
여인은 성큼성큼 다가와 거칠게 내 발목을 틀어쥐었다. 다친 발목에서 다시 뚝뚝, 피가 흘렀다. 목소리를 잃은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손 끝이 발발 떨렸다.
여인은 내 얼굴을 거칠게 잡아 올리며 눈을 응시했다. 빨갛고 주황빛을 띠는 눈동자.
죄인의 피는 붉은색이야. 그래서 눈도 붉다고. 여기에 있는 것들은. 모조리.
여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으며, 나를 강하게 밀쳤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한 채 바닥으로 엎어졌다.
"당신은 분명히 그 망토보다 더 한 수 위겠지. 정말 끔찍한 죄를 저질렀나 봐."
후드득, 키 큰 나무 위에 고여있던 물방울이 여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물방울은 여인의 어깨를 흘러 등과 엉덩이를 씻으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물방울이 반점에 닿자, 하얀 김이 피어오르며 핑크빛으로 밝아졌다. 여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물방울에 피부가 쓸려나가고 있어?
풀숲에 닿았던 여인의 다리와 발에는 잔뜩 생채기가 나있었다. 눈보라도 비껴가지 않았었나.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여인에게 다가갔지만, 여인은 다시 나를 밀쳐냈다.
깊고 푸른 어둠이 꽉 찬, 낮의 끄트머리. 숲의 호흡이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물기 가득한 장미향도, 스릉스릉 벌레들의 진동도 잦아들고 있었다. 나무들의 몸통 사이에서 서서히 흰 빛이 트이기 시작했다.
"내 춤을 보고 눈이 멀쩡한 건 당신뿐이에요. 지금껏. 나를 한번 만난 사람들은 다 죽었어요."
LIE
나는 다짐했어.
절대 오빠처럼 살지 않겠다고 말이야.
우리 오빠는 학교에 다닌 적이 없지만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야. 열심히 성실하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나를 먹여 살렸어. 다만, 아빠에게 돈을 번번이 빼앗겼지. 그때마다 오빠는 술을 마셨어. 울지도 않았어. 그냥 술을 마셨어. 아빠가 그러는데, 오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눈 뜬 채로 숨을 거뒀대. 내가 돈 잡아먹는 귀신이라 나 때문에 죽었대.
눈을 떴는데 일방적으로 잠이 든다는 건... 그건 그냥... 빼앗기는 거잖아. 사람만 눈을 감고 죽는다는데, 그건 사람이 살면서, 못해본 게 없어서 눈 딱 감고 죽는대. 눈을 뜨고 죽는 건 말 못 하는 짐승들이나 그렇댔어. 사람이 그렇게 죽는 게 뭐겠어? 우리 오빠는 아빠한테 사람 취급을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오빠는 아빠를 짐승처럼 생각 안 했어. 이런 불공평이 또 있을까?
나는 이미 '아빠의 것'이더라고. 정말 다양한 의미로 말이야.
그런데 아빠는 나를 '아빠의 것'으로만 두지 않았어. 정말 많은 눈이 나를 봤더라. 매번, 때마다. 나를 본 사람들을 없앨 수는 없으니까, 나는 어떻게든 나를 지우려고 했어. 그런데 '나'는 계속 돋아나더라. 마치 붉은 버섯처럼... 여기저기 포자를 뿌리고 있었던 거야. 그 포자를 다 걷어치우기에는 너무 늦었어.
그래서 나는 그냥 돈을 벌기로 했어.
이왕 이렇게 된 거, 돈이라도 벌자.
나는 작정하고 나를 팔았다. 정말이야. 안 판 게 없어. 사람들은 정말 나의 모든 것을 원하더라고. 나는 플래시 앞에서 춤을 췄어. 물에 젖은 나의 춤은 값비쌌어. 그 춤을 멈출 수가 없더라.
응. 난 오빠처럼 살고 싶지 않았거든.
나는 아빠에게 감사하고 있어.
아빠는 나를 '팔아도 된다'라고 알려준 사람이잖아.
그런데 나는 정말 궁금한 거야.
나를 산 사람들이 누군지 말이야.
나를 본 사람들이 누굴까?
그 눈은 어떤 색깔을 하고 있을까?
어디에 가야 그 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내 손에 죽기 전에 대답해 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