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 2

빨간 모자

by 백설

한참을 휘몰아치는 눈보라.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광야는 하얗게 얼어붙어있었다. 눈덩이들이 후둑 후둑 떨어져 내렸다. 발목에서는 빨갛게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핏방울은 장미의 잔향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늑대들의 숨소리가 숲 주변을 가득 메웠고 눈발은 사정없이 휘날렸다. 세상은 오로지 초록과 하양뿐이었다. 강풍에 흔들리는 나무들, 바람에 쓸려가는 눈발. 늑대들은 어느덧 숲 주위를 둥글게 에워쌌다. 그리고 저 멀리, 빨간 점 하나가 움직였다.




어린아이?




곧 늑대들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늑대들이 일제히 허공을 향해 흐느끼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온몸을 떨며 다시 눈을 떴다. 늑대들이 흘리는 침은 눈밭에 떨어지자마자 소용돌이를 그리며 하얗게, 검은 하늘 속으로 사라져 갔다.


저들의 속은 얼마나 뜨거운 것일까. 저들은 추위를 모르는 것 같았다.


포효의 소리 대신 검은 하늘이 온통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다친 발목의 피는 더 뜨겁게 흘렀다. 점점 어지러워지려는 찰나 쏟아지는 얼음비가 손가락 끝을 스쳤다. 다시 핏방울이 뚜둑, 아래로 떨어졌다. 그에 늑대들이 한차례 진동했다.


나는 나무를 꽉 붙들고 버텼다. 후두두둑. 피비린내와 끈적함, 뜨거움. 나는 크게 숨을 몰아쉬며 늑대무리들을 노려보았다. 저 눈밭 너머에서 연분홍빛 너울이 밀려오고 있었다. 일렁, 일렁.





춤?






False



'춤'은 거세게 타오르며 때로는 고요하게 내려앉았고, 발 끝에서 빛가루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연분홍빛 망토는 꽃잎처럼 벌어졌다가 다시 닫혔다. 리본은 어깨에서 흘러내려 발등을 휘감고는 정수리 위에서 휘날리고 허리춤에서 부채처럼 펼쳐졌다. 얼음비도, 돌풍도 모두 그를 비껴갔다.


늑대들의 눈에서 광채가 쏟아졌다.

타 다다다다다다-


늑대들의 눈은 맹렬하게, 마치 플래시가 터지듯이.




눈이... 터지고 있어?




향기로운 물의 향이 퍼졌다.

아름답고 눈부신 춤사위.


눈이 터진 늑대들은 바짝 말라붙어 눈보라에 휘말리고, 얼음비에 난사당하며 검은 하늘 위로 사라졌다.





빛과 춤은, 얼어붙은 정오를 새파랗게 찢고 있었다.





늑대의 대열 저 끝에서부터 지퍼가 잠기듯, 더 질긴 어둠이 눈밭을 물들이고 있었다.


망토는 와인빛으로 짙어졌다. 농염해지는 춤. 망토 속 상앗빛으로 숨어있던 춤의 주인은, 숲에 가까워져서야 실루엣을 드러냈다.



아이가 아니야?



망토는 늘어져 핏빛 밧줄이 되어 그를 옭아맸다. 그는 다시 한번 발 끝으로 서서 망토를 들고 힘차게 회전했다. 그 망토가 숲의 어귀에 닿자, 텅- 하는 진동과 함께 춤의 주인에게서 벗겨졌다. 그리고 배고픈 하이에나처럼 빠르게 땅을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주르르, 똑. 발목에서 핏방울이 아래로 떨어졌다. 망토가 부르르, 떨며 몸을 빳빳이 세웠다. 망토는 뱀처럼 나무를 기어올랐다. 나를 입어. 나를 입으면 너의 발에는 날개가 달릴 거야. 어서, 나를 입고 춤을 춰...


나는 머리 위를 강타하는 얼음비를 고개 숙여 피하며, 나무의 얼어붙지 않은 부분을 더 꽉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쐐액-


망토가 내 발목을 휘감고서는 뒤꿈치를 깨물었다. 그리고서는 넓게 펼쳐지며 솟아올라 내 머리 위를 덮쳤다. 나는 망토에 휩싸인 채,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숲이 한 차례 진동했다. 물의 향과 장미 향이 물씬 풍겼다.


나를 감싸 안은 망토는 밧줄처럼 길어지려다, 내 피에 젖은 부분부터 점점 노란빛으로 변해가며 힘을 잃었다. 움직임도 느려졌다.



당신의 피는 황금이군.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하늘이 파랗게 동이 트고 있었다. 스산한 소리가 점차 가라앉고, 습한 공기 역시 잎과 줄기 위의 물방울로 맺혀 물밭을 이루었다.



당신은 말도 못 하는군. 황금빛 피에는 욕망이 없지.



망토는 붉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피비린내가 훅 끼쳤다.






춤의 주인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키 작은 나무 잎사귀들의 젖은 물기를 털어내며 천천히 나의 등 뒤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이가 아니었다. 이제 막 소녀 티를 벗은 여인이었다.



여인의 몸에는 붉고 진한 꽃무늬가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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