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다시 시작
회사를 그만둔 지 일 년 반, 사실 이것저것 시도는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아 점점 답답해지기만 했다.
결국 최근에는 내가 스스로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나 보다, 하며 자신감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못 하고, 이렇게 나이 들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져 가겠구나, 남들 다 잘 버티면서 사는데 무슨 자신감으로 대기업 걷어차고 나왔나, 슬 후회가 되려던 참이었다.
그깟 우울증, 꾹꾹 참지, 좀 더 참아보지. 참다 보면 괜찮아졌을 수도 있는데(안다, 아니라는 것)...
후회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아이가 배우고 싶어 하는 것을, 돈이 없어서 해줄 수 없다는 말을 삼키게 되는 상황이 오자 결국 다시 아무 데나 취직해서 돈 벌어와야 하나 하는 생각에 구직사이트를 기웃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다시 회사원으로 돌아가 원하지 않는 재미없는 일을 하며, 회사에 꼼짝없이 붙잡혀 있어야 되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동시에 나의 나태함과 부족한 끈기를 절절히 느끼면서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회사원으로 돌아가기 싫으면 애초에 목표했던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되는데 이 게으른 인간!
내가 사실 의무감에서 벗어나면 게으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회사라는 환경에서 워낙 성실한 조직원으로 오래 일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다.
막연하게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월급이 없어지면 더 간절하게 뭔가를 찾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13년 회사원의 허울을 벗으니 넘치는 불안함과 여유 시간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다시 찬찬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일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 바뀐 것도, 새로 알게 된 것도 없어서 너무 답답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모르겠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어서 점점 초조해졌다.
그러다 문득, 정말 문득 깨달았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잘 몰랐다는 것을.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결정적으로 내가 왜 길을 잃고, 우울의 늪에 빠지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이해가 안 됐다. 성공적인 학창 시절을 보내고, 최고의 학벌과 대기업 타이틀을 가지고, 결혼 적령기에 결혼해 강남 아파트에 사는 나의 삶이 어디에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철저히 세상의 잣대로 내 인생을 점검하니 알 도리가 없었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어떤 책을 읽었다. 스님이 쓰신 책이었다. 그리고 한 문구에 충격을 받았다.
무슨 일을 하든, 매 순간 내가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내가 하는 행위에 오롯이 몰두해야 내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토록 내가 찾아 헤매던 이유를 알았다.
나는 회사 생활과 결혼 생활을 거치면서 힘들다는 생각뿐, 점점 다른 생각은 안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점점 잃어가면서 길을 잃었고, 결국 우울증을 얻었다.
나 자신을 잃으니,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뭘 원하는지도 아무것도 모른 채 방황하게 되었고, 그 시간이 길어지자 결국 무력감 끝에 우울과 불행을 얻어, 남 탓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잃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이 너무 길었던 나머지 나 자신을 잃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도 이토록 오래 걸렸다.
어렸을 때 나는 몽상을 즐기던 아이였다. 항상 생각이 많았고, 나 자신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내 중심에는 항상 단단한 내가 있었기에 예민하고, 그래서 불안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있었고, 자신감이 있었다.
그랬던 내가 대학생이 된 후 나를 잃어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한 대학생활이 아니라는 실망감에서 방황하기 시작했고, 노력한 시간과 학벌 타이틀이 아까워 버리지 못하게 되면서 점점 더 길을 벗어나게 되었던 것 같다. 매번 내 인생의 문제에서 만큼은 단호했던 내가 그때 아니라고 생각한 길을 벗어날 결정을 못하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는 걸 이제 와서 깨달았다.
나는 지금, 새로 태어난 기분이다.
원인을 알았고, 그래서 지금 정말 행복하고, 모든 것이 나 자신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걸을 알게 된 이 순간, 나는 다시 자신감이 넘친다.
나 자신의 자리를 자꾸 대신 차지하려고 치고 들어오던 물질적인 욕망, 아이에 대한 욕심 등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중심이 되어선 안된다는 걸 깨닫자 지금 나는 너무 자유로워졌다.
18년 만에 다시 행복을 꿈꿀 수 있게 된 것 같다.
나 자신의 행복이 나의 마음에서부터 온다는 것, 마침내 제대로 와닿았다.
자, 이제 다시 행복해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