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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Jul 03. 2024

7. 그리스 비극의 정점, <오이디푸스 왕>

시작부터 돌이킬 수 없어 더 비극적인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을 모두 합쳐도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에 견줄 수 있을까. 셰익스피어를 읽은 지 너무 오래돼서 그런 것일까. 어쨌든 셰익스피어가 있기 2천 년 전에 그리스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가 있었다. 기원전 작품이지만 기존에 읽었던 호메로스나 인도 서사시들에 비하면 문체와 전개가 현대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희곡인 만큼 구어체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며, 또한 신화와 서사시를 모티브로 하여 한 층 더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과 관계를 쓰기 시작했기 때문인 듯하다.


실제로 소포클레스의 비극들은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등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그리스 영웅들의 이야기들이다. 그나마 오이디푸스 3부작이 서사시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비극들에 비해 서술이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호메로스의 영향을 최대한 적게 받은 소포클레스의 글이기 때문인 것일까.


소포클레스의 비극들은 전개가 특이하다. 비극이 일어나는 발단이나 계기부터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는다. 이미 비극이 충분히 진행된 상태에서, 결정적인 순간이 가까워졌을 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니 독자는 첫 장을 열자마자 긴장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이 비극은 절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으로부터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소포클레스는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와 함께 그리스 비극 3대 작가 중 하나다. 평생 130편에 이르는 비극을 썼다.


오이디푸스 왕은 과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살아왔다. 그런 그가 신탁에 의해 아버지를 살해한 자를 찾아내려고 하는 장면이 작품의 시작이다. 물론 독자들은 오이디푸스 이야기를 다 알고 있다. 현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사람들도 신화의 일부이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포클레스는 이런 과감한 전개 방식을 택했을 것 같다. 오이디푸스는 직접 범인을 찾기 위한 수사를 하면서 예언자의 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도 한다.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나 추리에 따라 마음을 놓았다가도 다시 불안해하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긴장의 완급이 보는 이를 더욱 안타깝게 하고 이야기를 더욱 비극적으로 만든다. 2천 년 전에 이런 이야기 구성과 소재와 전개라니. 문학에는 발전이 아닌 변화만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신들의 이야기를 하자면, 확실히 호메로스에서보다 신들의 개입이나 영향력이 매우 적어졌다. <일리아스>에서 <오뒷세이아>로 갈 때도 그랬지만, 소포클레스로 오면서는 더욱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신들은 그저 이야기를 꾸며 주는 정도로 등장하며, 아주 간접정인 영향만 미친다. 실제로 이야기들에서 신을 삭제해도 상관이 없을 정도다. 다만 등장인물들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신의 의지로 돌린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거나 은혜로운 일들 모두 신의 의지다. 그 의지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모두 신의 뜻이다. 이러한 불가지론을 통해 신은 오히려 더 절대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괜히 인간 세상의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상처를 입고 도망치는 <일리아스> 속 지질한 신의 모습은 없다. 어쩌면 인간 사회의 모습이 보다 체계적이고 복잡하게 변화해 감에 따라, 종교를 이용한 통제와 교육이 중요해진 만큼 신의 역할이 변화한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가 자살하자 그녀의 브로치로 눈을 찔러 실명하고, 크레온에게 자신을 추방해 달라 요구한다.
선택이 아닌 운명에 의해 비극을 맞은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는 끝내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했음을 알게 되고, 어머니이자 아내는 자살한 뒤 자신은 그녀의 브로치로 눈을 찔러 실명한다. 그는 죽지도 못하고 평생을 자신의 과거에 고통받으며 맹인으로 힘겹게 살아가야 한다. 오이디푸스는 매우 성미가 급한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신탁을 듣자마자 범인이 받을 벌을 공표하며 저주하고, 범인이 자신으로 드러나자 바로 실행에 옮긴다. 그의 비극이 시작된 사건에서도 그렇다. 길을 가다 맞닥뜨린 자신의 아버지(당시에는 몰랐지만)가 몽둥이로 그를 치자 정당방위로 죽이고 만다. 물론 자신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일말의 망설임 없이 살인을 저지른 것이 그의 성미를 보여준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오이디푸스가 그렇게 잘못한 것도 없다. 자신이 아비를 죽일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그래서 비정한 아비가 그를 죽이라고 한 것도, 그를 버리려던 시종이 그를 죽이지 못하고 다른 이에게 맡겨 버린 것도, 그리고 그 뒤에 일어난 모든 일도 그의 탓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는 복수를 선택한 햄릿, 아내를 의심한 오셀로, 헛된 야망으로 왕을 배신한 맥베스, 못된 자식들을 믿고 권력을 넘겨준 리어왕. 모두 주인공들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비극을 맞는다. 그에 비하면 오이디푸스는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다. 실제로 그 자신도 스핑크스로부터 나라를 구해 왕이 된 것이 자기의 잘못이라고 한탄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과거가 드러난 순간,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동침했다는 그 사실 자체에만 매몰되어 모든 잘못을 자신에게 돌리고 좌절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만다. 하나 그 훗날을 그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는 실제로 모든 것은 운명에 의한 것이며, 알 수 없는 신의 의지로 벌어진 일이지, 자신의 잘못이 아님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에 반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그는 죽기 직전이나마 스스로, 그리고 테세우스에 의해 작은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실명한 채 추방당한 오이디푸스와 그를 보살피는 딸 안티고네


최악의 비극 당사자인데도 오래 살아 늙어 죽은 데다 마지막에 안식까지 얻은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지만, 어쩌면 그랬기에 더 비극적인 인생이라 할 수도 있다. 눈이 멀어 딸들의 수발을 받느라 딸들과 떠돌이 비렁뱅이 신세가 되었으며, 그 때문에 딸들은 결혼도 못하고 있었다. 아들들은 자신을 무시하다가, 늘그막이 되어서야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찾아오고, 그는 두 아들이 서로를 죽이리라는 저주를 내린다. 이 저주는 훗날 <안티고네>에서 실제로 이루어진다. 그렇게 운명에 대한 분노와 자기 멸시, 크레온과 아들들에 대한 분노를 가진채 왕에서 비렁뱅이로 몰락한 삶을 늙어 죽을 때까지 살았으니 어쩌면 어머니이자 아내와 함께 죽는 것이 나았을 수도 있다. 그나마 아들들에 대한 저주가 이루어지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수발을 든 안티고네마저 그 사건에 휘말려 자살하는, 자식들의 비극을 보지 않고 죽은 것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비극에는 묘한 에너지가 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고민하고, 후회하고, 되돌아보고, 가정하게 한다. 그러면서 각자 나름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비극은 계속해서 이야기되고 분석된다. 수백만 명이 전쟁을 벌여 역사를 뒤바꾸어 놓는 서사시의 규모에 비하면 한 개인의 고뇌와 삶이 얼마나 유의미할까 싶지만, 정작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비극이다. 비극이 가진 힘은 2천 년 뒤 셰익스피어를 탄생시켰고, 대부분의 문학이나 예술작품이 비극을 주제로 삼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서사시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그리고 <오이디푸스 왕>을 극찬했다고 한다. 언젠가 <시학>을 읽어 비극에 대한 이해를 넓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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