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자미상 <천일야화>
<천일야화>는 이슬람 세계의 방대한 민담, 전설 등을 엮은 작품으로 이슬람 문화를 아주 생생하게 다루고, 이슬람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정작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은 이 작품이 너무 선정적이어서 천하고 저속하다며 부끄럽게 여기기도 한다. 이는 과거 유럽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16세기에 프랑스인 앙투앙 갈랑은 <천일야화>를 번역하면서 교훈을 주는 내용들만 남기고 저속한 내용들은 들어내거나 순화했다. 반면 18세기 영국인 리처드 버턴은 있는 그대로의 표현들을 모두 살려내어 번역했다. <천일야화>는 보통 이 두 사람이 번역한 2개의 판본을 기본으로 한다. 나는 되도록 원작에 가까운 번역을 선호하기에 리처드 버턴 판으로 읽었다.
<천일야화>는 익히 알려져 있듯 한 여인이 1001일 동안 매일 밤 왕에게 바치는 이야기다. 왕비의 외도를 목격하고 여성 혐오에 빠진 왕은 매일 밤 처녀와 밤을 보낸 뒤 다음날 죽이는 폭정을 반복한다. 이를 막기 위해 재상의 딸 샤라자드가 자진해서 왕의 침소로 들어가고, 샤라자드는 왕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왕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 샤라자드를 살려두고, 샤라자드는 이를 1001일 동안 반복한다.
이렇게 샤라자드가 왕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페르시아 시대의 설화들로, 연애, 우화, 모험 등 다양한 주제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액자식 구성으로 펼쳐진다. 특히 이 액자식 구성이 몇 겹씩 반복되는 것이 <천일야화>의 묘미인데, 이 복잡한 구성 때문에 흐름을 따라가기가 난해한 경우도 많다. 그래도 겹겹이 진행되는 다채로운 이야기들과 결정적인 부분에서 이야기를 끊고 이어가는 구성은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준다. 이는 모두 하룻밤 하룻밤 살아남기 위한 샤라자드의 눈물겨운 전략인 셈이다.
<천일야화>의 특별함 중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중동 이슬람 문화를 상세히 체험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생활양식부터 언어적, 행동적 특성과 습관, 이슬람교의 교리와 문화들, 사고방식, 사막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그에 따른 건축, 생활, 목축, 음식 등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다. 문화는 결국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해석되고 녹아들어 만들어지는 것인 만큼, 이러한 민담을 통해 접했을 때 매우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접해 본 이슬람 문화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기독교의 예수와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는 이슬람교 성인 마호메트는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간에 불과하기에 성인이지만 과오를 범하기도 하며, 이슬람 신자들도 이를 인정한다. 또한 이슬람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기 때문에 마호메트를 그릴 때 우상숭배를 막기 위해 얼굴을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개종을 무척이나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만, 포교 자체에 적극성을 띠거나 강요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이미지가 ‘칼과 코란’인 만큼 행동 자체는 과격하고 잔인하다. 하나 이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중동 문화권의 보편적인 특성으로 보이며, 그들 역시 기독교만큼이나 사랑, 자비, 관용을 중요시한다. 가족, 친구, 이웃은 물론 원수까지도 종교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감화된다면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래서 간혹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쉽게 속는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관용의 문화는 기독교보다 더 폭넓게 느껴지는데, 한 예로 기독교는 동물에 영혼이 없다고 보지만 이슬람은 동물의 영혼도 인정하여 가엾게 여기고 온정을 베푼다. 성경이나 기독교 이야기들에 동물이 잘 나오지 않지만 천일야화에는 동물 이야기가 매우 자주 나오며, 동물이 주인공인 이야기도 많고 동물이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그 교감을 풍부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천일야화> 속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교훈적이고 열정적이며 감정적이고 환상적이고 운명론적이다. 특히 운명론적인 부분이 두드러지는데, 이는 기독교 문학들에서도 볼 수 있었던 특징으로 유일신 신앙이 가진 공통점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신은 미래까지 모두 알 수 있는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 존재로,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그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일야화>의 이야기들은 보통 등장인물의 노력이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우연처럼 보이는 운명적인 사건 의해 생사길흉이 결정된다. 그리고 이 운명은 대개 권선징악을 따라 흘러가기 때문에 그 수많은 이야기들이 대부분 비슷하게 느껴지며 금방 휘발되는 편이다. 다만 민담들이 대개 그러하듯 시원시원하게 읽히고 명확한 교훈을 주며 깔끔한 스토리 전개와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확실한 것은 장점이다.
그렇다면 화자인 샤라자드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1001일간의 이야기를 마치고 그간 낳은 아이 셋을 보이며 왕에게 자비를 청한다. 왕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잘못과 악행을 뉘우치고 샤라자드를 왕후로 맞이한다. 그동안 샤라자드가 들려준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자비, 연민, 사랑 등의 교훈을 얻은 결과다. 게다가 왕은 자신과 같은 처지로 망가져 버렸던 동생을 불러 샤라자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동생 역시 갱생하여 샤라자드의 동생 두냐자드와 결혼하여 형과 함께 행복하게 살기로 한다. 숱한 <천일야화> 이야기들처럼 대단원 역시 해피엔딩이다.
<천일야화>의 거의 모든 이야기들에서 아름다운 외모는 지나칠 정도로 강조된다. 인간의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묘사는 그 어떤 작품에서보다 세세하고 적나라하며, 그 가치를 무엇보다 높게 치기도 한다.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을 용서받고 무한한 호의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놀라운 것은 샤라자드가 등장할 때 그녀의 외모는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저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인으로 등장해 홀로 1001일 동안 무수한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창조자는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를 창조할 수 없을 터, 샤라자드의 이야기 속 천태만상의 인물들은 모두 그녀에게서 나온 것이다. 아무리 전해 내려 오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모두 꿰차고 있는 샤라자드는 얼마나 지혜가 깊고 넓을 것인가. 왕도 이에 감탄해 그녀를 두 팔 벌려 왕후로 맞았다. 이렇게 샤라자드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숱한 여인들과 달리 외모가 아닌 지혜로 왕을 감화시키고 나아가 독자들을 깨우친다. 그리고 모든 결론이 난 뒤에서야 결혼식 장면에서 샤라자드의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외모가 묘사된다.
<천일야화>를 다 읽는 데 두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너무도 기나긴 시간, 방대한 분량, 셀 수 없는 등장인물들과 이야기들. 어쩌면 지쳐버릴 수도 있었지만 <천일야화>가 담고 있는 이슬람 문화의 수많은 면면을 생각하면 두 달이라는 시간도 초라할 뿐이다. 다만 <천일야화>의 이야기들이 어떤 특색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흘러가며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는지, 과거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아주 강하게 뇌리에 남았다. 그리고 이 특색 있는 문화와 이야기들은 현대의 온갖 문화예술 속으로 퍼지고 녹아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열렬히 소비되고 있다. 종교와 문화의 거대한 힘에 찬사를 아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