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홀케이크라면

by 서지현
카스텔라가 결혼기념일이라고 말해주었다


오래간만에 카스텔라를 구웠다. 도우를 부은 원형 케이크 틀을 기포가 꺼지라고 바닥에' 탕탕' 몇 차례 내리쳤다. 그 뒤는 오븐에 맡겼다. 그러나 애초에 정확한 레시피를 따른 게 아니라서 오븐 앞을 뜰 수가 없었다. 오븐 설정 온도와 시간이 적절한지 어쩐지 영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싹이라도 품고 있었던 듯 도우는 느리게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닐라향 파우더도, 그 흔한 버터 조각도 넣지 않았는데 집안은 순식간에 빵 굽는 향내로 가득 찼다. 반죽 재료의 팔 할이 계란이라 그러한가 보다고 짐작할 따름이었다.



달리 할 일 없이 오븐 앞에서 마냥 궁싯거리기 시작했다. 달콤한 향기에 취해 느긋하게 이 생각 저 생각을 오가면서.

'이 동그란 모양의 카스텔라에 생크림 좀 바르고 과일 몇 개 얹으면 근사한 케이크가 될 텐데. 평범한 날이면 어때? 케이크의 유래 같은 거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 케이크는 그 자체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법인데.'

라고 생각하는데 오븐 속 카스텔라가 조개처럼 자꾸만 입을 벌리는 것이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가?

'특별한 날...겨, 결혼기념일...'

"가만있자. 오늘이 12월 O일, 아차, 결혼기념일!"


그 날은 다름 아닌 우리 부부의 9년째 결혼기념일이었던 것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까먹은 셈, 지금껏 우리는 부부의 날을 기억해서 특별한 의식을 치러본 일이 거의 없다. 기념일을 지나친 것을 나중에서야 깨닫고 서로가 머쓱해하며, '평소에 잘 살고 있으니 그걸로 된 거다'라고 안위하곤 했다. 그나마 이번엔 하루가 다 가기 전 기념일을 알아채기라도 했으니 다행으로 쳐야 할까?



한없이 부풀어 오르며 입을 벌리는 카스텔라 앞에서 남편과 나의 결혼 생활을 떠올렸다. 계란과 오일과 설탕만으로 구운 이 단순한 빵, 우리의 결혼 생활도 이 빵과 다름없었다. 양념 한 번 제대로 치지 않고, 향신료도 전혀 없이 오직 노른자위만 가지고서 여기까지 무탈하게 달려온 것이 아니던가.





환하게 웃어줄 아이들을 떠올리며 당근케이크를 굽던 어느 겨울 한밤중에


"얘들아, 오늘이 엄마, 아빠 결혼한 날이야."

"아, 그래서 오늘 빵 구운 거야? 축하하려고?"

"응? 뭐 그렇기도 하고..."



남편에게 빵 한 조각을 덜어주며 말했다.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

"(우이 씨.)"


생크림도 안 바르고 과일 토핑도 못 올린 케이크지만 그래도 괜찮다. 충분히 달콤하고, 부드럽고, 폭신하게 구워졌으니. 무엇보다 따끈하게 구워져 온기를 나눌 수 있으니 그걸로 됐다.



삶은 결국 케이크를 한 조각 한 조각 덜어내는 일이다.



삶이란 케이크를 한 조각 한 조각 덜어내는 일과 같다. 결국 파이가 남지 않는 순간이 온다. 삶은 어느 날 갑자기 멎지 않는다. 인생은 서서히 스러져 간다. 다만 파이를 함께 나누던 이와의 정담과 추억만이 남을런가. 때론 고소하고, 때론 달콤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이야기.



홀케이크는 오직 여덟 조각. 고심 끝에 추려진, 정말로 소중한 이와 파이를 나누고 싶다. 빈 케이크 판 위로 후회와 슬픔이 아닌 애틋한 그 무엇을 남기기 위해서. 한 번씩 마음이 동할 때는 진심과 성의를 다해 케이크를 구울 것이다. 당연한 줄 알았던 우리의 만남과 별 것 없어 보이는 일상이 이 작은 수고로 특별함을 덧입을 수만 있다면.



파이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아직 곁에 있어 다행이다. 결혼 10주기인 내년만큼은 잊지 말고 꼭 잘해보자고 다짐을 두던데, 까짓것 괜찮다. 까먹으면 또 카스텔라가 말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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