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빈 병을 보면 가슴이 설렌다.
언젠가부터 예쁜 병만 보면 가슴이 설렌다. 주부가 되면서 생긴 일종의 살림병인 것 같다. 투명한 빈 병을 마주하자면 무엇으로든 채우고 싶고, 바닥을 드러내는 병을 보면 당장 비우지 못해 안달이다. 어떻게든 비워낸 병에는 또 무얼 담으면 좋을까, 하고 나만의 즐거운 고민을 다시 시작하고야 마는 것이다.
모양과 크기와 쓰임이 다른 병을 모으는 일은 그 자체로 즐겁다. 병에 대한 나름의 취향도 생겨났다. 몸통이 각진 병보다는 둥근 원통 모양이, 입구가 좁은 것보다는 넓은 것이 쓰임이 좋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가장 아끼는 병은 '복음자리'에서 출시된 잼병이다. 아래로 죽 뻗어나가던 둥근 몸통이 밑면에 가까워지면서 아슬하게 좁아지는 모양이 어찌나 요염하고 사랑스러운지. 잼병을 두 손으로 감싸고 한참이나 바라본 적도 있다.
병에 대한 깊은 애정은 수제잼 만들기 취미로 이어졌다. 잼 만들기를 굳이 '취미'라 말한 이유는 이것이 정말로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기특한 취미가 또 있을까? 제철 과일로 만들어둔 잼은 일 년 열두 달 집안 식탁을 풍요롭게 한다. 덕분에 우리 집 식탁은 언제든 지난 계절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계절은 언제나 최고의 부산물을 내어주고 난 최소한의 품을 들여 그것들을 저장하려고 애쓴다. 투명한 빈 병에 계절을 담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가슴 설렌다.
봄철에는 딸기잼을 만든다. 요즘은 봄을 딸기 철이라 말하기가 무색하다. 마트며 시장에 쏟아져나온 겨울철 하우스 딸기는 당도가 높고 가격대도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딸기 몇 팩을 사다 먹다가 봄 끝자락이 되어서야 딸기잼 만들 궁리를 시작한다. 잼은 굳이 노지 딸기를 구해다 만드는데, 그것은 봄 끝물이 되어서야 만날 수 있다.
노지 딸기는 알이 작고 단단하다. 얼어붙은 땅을 힘 있게 뚫고 올라온 생명의 단단한 기운이 느껴진다. 노지 딸기는 한편 단맛보다 새콤한 맛이 강하다. 노곤하고 나른한 몸을 깨워주기라도 하려는 듯. 봄을 똑 닮은 과일, 기어이 딸기를 병에 담고 만다.
먼저 딸기를 발효시킨다. 깨끗이 세척하여 물기를 제거한 딸기를 밥솥에 넣어 보온 상태로 이틀간 두면 된다. 밥솥에서 발효되는 동안 과일의 과즙과 과육이 분리되면서 물이 흥건해진다. 여기에 사탕수수당(원당)을 약간 넣고 원하는 질감이 되도록 졸인다. 딸기 알의 둥근 과육이 뭉개지지 않도록 가만가만 저어준다. 과즙이 이미 빠져나온 상태라 졸아드는 시간이 길지 않다. 설탕을 과일과 동량으로 넣어 졸인 환한 빛깔의 시중 잼과 달리 발효 딸기잼은 색이 어둑하다. 점성 또한 덜하지만 딸기의 과육이 살아있어 당절임에서 맛볼 수 있는 맛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어느 나른한 봄날 오후, 딸기잼을 만들어두지 않으면 곧 후회하게 되리라. 봄이 내준 숙제를 끝마치지 못했다는 찝찝한 기분마저 들 테지. 아직 끓어오르는 딸기잼을 맑고 투명한 병에 담으며 감히 꿈꾸어본다. 햇빛 쨍쨍 여름 오후와 온몸 꽁꽁 한겨울, '뻥' 하고 병뚜껑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별안간 환한 봄이 열리기를. 상큼한 딸기와 더불어 싱그러운 봄기운을 만끽할 수 있게 되기를.
무화과와 사과 역시 발효의 과정을 거쳐 잼을 만든다. 딸기나 무화과와 같이 과육이 무른 과일은 이틀, 사과처럼 단단한 과일은 삼일 발효가 적당하다. 원당을 적게 넣고 졸인 잼은 점성이 덜한 질감으로 잼보다는 스프레드에 가깝다. 빵이나 요플레에 듬뿍 올려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잼이다.
초여름엔 무화과잼을 만든다. '꽃'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름 과일 무화과. 숭덩숭덩 잘라 접시에 올리면 무미건조한 식탁에 화사한 꽃이 핀다. 이렇게 생과로 먹기만도 아까운 무화과를 굳이 잼으로 만드는 이유가 있다. 담박하고 순한 단맛이 좋아서다. 씹을 때 톡톡 터지는 씨의 독특한 질감, 이 또한 무화과 잼이 가진 매력이다.
마음이 동하는 어느 가을날엔 사과를 조린다. 홍옥으로 만든 잼에는 초가을의 신선함이, 부사로 졸인 잼에는 가을의 깊은 맛이 담긴다. 사과잼 만드는 날, 집안 곳곳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신선한 가을내음과 사과잼 졸아드는 달콤한 향이 버무려진다. 가을과 내가 하나가 되는 그 순간이 좋다.
잼을 만드느라 불 앞에서 냄비를 젖고 서있을 때가 많다. 잼은 약한 불에서 뭉근하게 끓으며 서서히 졸아든다. 그 지루함 뒤에는 어김없이 병입의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 다 된 잼이라도 불을 아예 끄면 안 된다. 불씨를 살풋 남겨둔 채 한 손으로 잼을 퍼올린다. 잘 소독된 투명한 병을 다른 한 손에 단단히 거머쥔다. 김 오르는 달콤함의 정체가 조르르 병에 담긴다. 빈 병에 계절이 담긴다. 병입, 살림이 예술이 되는 순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집밥이 지루하거나 식탁이 단조로워질 때쯤 지난 계절에 만들어둔 각종 잼을 꺼낸다. 봄날의 딸기잼, 초여름의 무화과잼, 그리고 어느 가을날 넉넉히 졸여둔 사과잼, 다 나와! 다소 퍼석하고 거친 호밀빵에 수제잼을 취향껏 올려먹는 가족들, 지난 계절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꺼내본다. 밥도 국도 없는 식탁이지만 조금 덜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