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뚝배기 닭개장
밥보다 잠이 고팠던 그날
쏟아지는 졸음을 가까스로 털어내고 교복을 차려입고 앉아 마주한 밥상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자체 발열하는 뭇 항성처럼 저 스스로 바글바글 끓고 있는 시뻘건 국물의 뚝배기 닭개장, 가스버너에 올려진 것도 아닌데 그렇게도 신나게 끓어댈 수 있을까. 그리고 뚝배기 옆에 얌전히 놓인 밥 반공기.
"뜨끈하게 닭개장에 밥 좀 말아먹고 가."
엄마는 그렇게 한 마디 툭 던지시고는 내가 가지고 갈 도시락을 바삐 챙기신다.
"아, 엄마, 나 늦었는데. 이렇게 뜨거운 걸 어떻게 먹으라고."
"그러게 깨울 때 일어나지. 깨우라 해놓고는 또 자고 또 자고."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밥 한 숟갈을 떠서 국에 말고 본다.
'켁! 켁!'
독하게 매운 고춧가루 양념 탓인지, 맛과 향이 강한 후추 탓인지 첫 술부터 사레가 들리고 만다. 발작적인 기침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조심스레 숟갈을 든다. 그래도 밥술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숟가락을 입 앞에 대고 호호 불어도 보고 밥숟갈을 작게 해보기도 하지만 너무 뜨겁다. 숟갈 아래서 여전히 보글보글 끓어대는 닭개장이 하냥 얄밉다. 밥을 다 먹도록 이 발열체가 식을 일은 없을 것만 같다.
'늦어 죽겠는데 엄만 하필 이렇게 뜨겁고 매운 국을 차려준담.'
엄마를 향한 화가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다. 밥을 먹는 내내 얼굴이 벌겠던 것은 국이 뜨겁고 매워서라기보다는 엄마가 도무지 이해 안 되고 미운 마음이 들어서였다.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엄마가 무슨 잘못인가. 깨워도 제때 못 일어나고 10분만, 5분만 하며 늦장을 피운 한창 잠 많을 나이의 여고생이, 그것도 아니면 깊은 피로감을 안겨준 수험생활 그 자체가 문제라면 문제였을 테지.
아침 밥상을 두고서는 가끔 불만이 품었지만 엄마가 아침마다 들려주는 칼 도마 소리만큼은 참 좋았다. 그것은 내가 유년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마음에 깊은 위안과 안정을 주는 소리였다.
'똑 또각 똑 또깍...'
잠결인지 꿈결에선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그 소리가 보다 일정하고 선명해지면서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제법 울림이 큰 소리임에도 칼도마 소리는 전혀 성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소리로 엄마 품의 포근함을 느끼며 한 잠 더 청하기도 했을 따름이다. 그것은 나보다 앞서 깨어난 엄마가 나의 하루를 위해 좋은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다정하고도 참 좋은 소리였다.
학교 생활은 대체로 즐거웠다. 종일 사각 책걸상에 붙박이처럼 앉아 지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시간 시간 웃을 일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엄마를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적어도 내가 보고 느끼기에 엄마는 행복하지 않았다. 다만 가족, 특히 자식에 대한 책임감으로 힘겹게 하루하루를 이어나가고 계셨음에 분명했다.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만일 엄마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그리고 우리 집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들이었다. 곧 의식적으로 생각을 그만두고는 공부에, 학교생활에 집중하려 애썻다. 그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새로운 아침이 되어 귓가에 엄마의 칼도마 소리가 들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안심이 되었다. 엄마는 지금 어쨌든 내 곁에 있고 변함없이 내 뒤를 봐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도가 되었다. 엄마가 되고서야 그 소리의 분명한 정체와 의미를 안다. 주방에 서서 칼 도마를 두드릴 수 있다는 건 최소한의 살아갈 힘과 용기가 있다는 뜻이다. 몸이 심하게 지친 날, 그리고 고민이 무척 깊은 날엔 칼도마를 두드릴 작은 기운조차 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그 시절 엄마가 지고 있던 삶의 짐과 고통은 어린 내가 여겼던 것보다 작고 가벼운 것이었거나, 인생의 큰 짐을 덤덤히 지고서 의연하게 칼도마를 두드릴 수 있을만큼 엄마는 강인한 사람이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마도 후자에 가까울 거라고 결론을 내리지만.
지금의 나라면 칼도마 소리만 듣고도 엄마가 대체 무슨 요리를 하려는지 알아챌 수 있을 텐데. 깍둑깍둑, 감자를 반듯반듯 네모지게 깍둑 썰어 감자조림을 하려는 건지, 나박나박, 가을무를 납작하고 얄팍하게 썰어 오징어국을 끓이려는 건지, 총총 총총, 당근을 가늘고 길쭉하게 채 썰어 볶아 김밥 속을 채우려는지 말이다.
뚝배기 닭개장을 끓이던 그날 엄마는 뚝배기가 바글바글 끓기 시작하면 내가 좋아하는 파를 듬뿍 올리기 위해 도마 위에 올린 새파란 쪽파 두어 줄기를 송송송송 썰어댔을 것이다. 이제야 정식으로 엄마에게 고백할 참이다. 그땐 정말 미안했다고, 밥보다도 잠이 너무 고파 어쩔 수 없었노라고.
이제는 나도 도마 소리를 들려주는 엄마가 되었다. 때때로 닭개장을 끓이기도 한다. 백숙용 닭을 한 마리 사다가 큰 솥에다가 충분히 끓여 육수를 내고 고기는 건져내 일일이 살을 발라낸다. 내 입맛을 닮아 파를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대파를 도마 위에 올려 신나게 도마를 두들긴다. 먼저 대파를 길게 반으로 가르고 최대한 가늘게 송송 썬다. 다만 아이들이 어려 고춧가루는 풀지 않는다. 그리고 국을 한 짐 식힌 후 뚝배기가 아닌 사기 국그릇에 닭개장을 담아 내준다. 아이들이 혹여나 엄마를 미워하는 맘이 들면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