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5일(일) 동화 속 마을처럼 작고 이쁜 마을...피레네의 관문
생장 피에드 포르에 들어왔다. 당초 일정보다 하루 일찍 생장에 도착했다. 9월6일 바르셀로나에서 팜플로나로 가는 렌페(국영철도)에 좌석이 없다고 해서 전날인 9월5일 서둘러 바르셀로나를 떠났다. 팜플로나 렌퍼 역에서 내려 도보로 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25분 걸렸다. 이곳에서 생장 피데 포르 가는 버스를 탔다. 웬만하면 차멀미하지 않는 내가 멀미에 시달릴 정도로 버스 운전자는 피레네 산맥을 드리프트하며 내려왔다. 중년의 여성 운전자인데 아주 시원하고 털털한 성격답게 운전도 아주 와일드했다. 생장에서 이틀 묵을거다. 다음 기착지 론세스바예스에 알베르게를 예약한터라 하루 더 묵으면서 AB-ROAD에 기고할 여행기 초안을 완성하고자 한다.
생장 피애드 포르의 중심가는 좁다. 동서남북으로 15분만 걸으면 마을 끝에서 끝까지 간다. 번화가 끝에는 숲이나 평원이 펼쳐지고 그 안에 오밀조밀 모인 주택들이 보인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상가를 따라 내려오면 작은 다리가 나오고 그 밑에 제법 맑은 물이 흐른다. 다리 건너 언덕 위로 성채가 위압적으로 솟았다. 성채 정문은 제법 높았고 그 중간 높이에 성모 마리아 상이 자리해 다리를 넘어 성채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을 내려다본다.
성채 정문을 지나자마자 바로 오른쪽에 성당이 나온다. 성당은 시간의 풍파에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공간의 성스러움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 성채의 지휘부로 보이는 건물까지 이어진 언덕을 오르면 순례자 사무소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순례객들을 맞이한다. 순례자들은 이곳에서 크레덴셜을 발급받고 생장 문장의 세요도 찍는다. 순례자 사무소를 지나 언덕을 1~2분 더 오르면 성채 동쪽 출입문 앞에 위치한 55번지 공립 알베르게가 나온다.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깨끗한 공립 알베르게로 정식 이름은 Refuge Municipal(순례자 보호시설 쯤으로 해석됨)이다.
성채 동쪽 출입문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동쪽에서 생장으로 들어오는 순례객을 맞이하는 곳이다. 12세기 순례의 전성기 시절 유럽 각국에서 출발한 순례객들이 피레네 산맥을 건너기 전에 체력을 비축하는 곳이었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온 순례객들이 프랑스길의 출발지 삼아 순례를 시작한다. 과거부터 피레네 산맥을 건너려면 생장을 거쳐야 한다.
피레네 산맥을 건너는 길은 4가지다. 아르노스테기(Arnosteguy 1236m) 벤타르테(Bentarte 1344m) 레포에데르(Lepoeder 1440m) 이바네타(Ibaneta 1057m) 등 1000m 넘는 산을 넘어야 한다. 그나마 고도가 낮은 산들이다. 아무튼 이 산에 접근하려면 생장으로 들어와야 한다. 프랑스가 강해져 이베리아반도를 넘보려면 피레네 산맥을 건너고 반대로 스페인이 강대해지면 피레네 산맥을 넘어와 생장부터 점령한다. 이곳은 바욘, 산 세바스찬 등 프랑스 내륙으로 진출하려면 확보해야할 전략적 요충지다. 그러다보니 스페인과 프랑스 간 쟁탈전이 끊이지 않았다. 도시 한가운데 높이 솟은 성채는 견고했다. 성채 중심부까지 길의 경사는 가파르고 성벽은 높았다. 웬만한 공성전에는 끄덕도 없을 듯했다.
이곳 가운데를 흐르는 강 옆에 바짝 붙어 있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송아지 요리에 맥주를 마셨다. 순례객 저녁식사로 조금 비쌌지만 하루 정도로 사치를 허락하자는 뜻으로 프랑스 요리를 멋지게 먹어치웠다. 맥주 한잔을 다 마시자 석양이 마을 뒷 동산 너머로 펼쳐졌다. 이곳 석양은 오후 8시를 지나 갑자기 찾아왔다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숙소에 들어갔더니 10명 정원의 방이 꽉 차있었다. 내 침대 2층에는 프랑스인 제레미가 있다. 그 옆 침대에는 아르헨티나인 훌리안과 그 여자친구가 2층 침대를 차지하고 있다. 그 너머로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의 미인 네로가 있다. 훌리안은 친절하지만 심드렁한 느낌으로 여자친구밖에 모르는 순정파 같다. 제레미는 정말 잘생겼다. 영화배우라고 해도 믿을 듯하다. 키도 크다. 피부는 멋지게 그슬러 건강미가 넘쳤다. 우리 침대 대각선으로 자리한 제레미의 친구 발레탕은 그냥 생겼다. 대신 아주 사교적이고 다변이라 단숨에 친구 먹었다. 제레미와 발레탕은 파리 북쪽 도시에서 출발해 2개월간 프랑스 도시를 거쳐 생장까지 걸어왔다. 앞으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걷다고 포르투갈로 넘어간다. 포르투갈 순레길을 걸을 참이란다.
직업이 뭐냐고 묻자 제레미가 여행자(traveller)라고 자신있게 답변한다. 저녁식사는 피자로 때우고 차를 마시면서 낯선 이들과 친구를 먹으면서 사는 모습이 행복해보였다. 무언가를 이뤄내려 열심히 사는 인생은 값지다. 그에 못지않게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발견하며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가는 것도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얼굴에는 생기가 넘치고 심성에는 악의가 없었다. 악착 같은 결기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자기 것을 얻기 위해 남을 해칠 의도는 전혀 없어보였다. 발렝탕은 어눌하기 그지 없는 영어로 캐나다인과 2시간 동안 대화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그걸 보는 내 눈에는 발렝탕과 에바가 참 행복해 보인다.
제레미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그는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나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했다. 구글번역기로 몇마디 나누다가 포기했다. 네로는 대부2편에서 마이클 꼴리오네가 신부로 맞이한 시칠리아 미녀 올림피아를 연상시킬 정도로 멋지다. 순레를 맞이하는 태도가 아주 심각하다. 그래서 혼자 남아서 고독과 사색을 즐긴다. 네로는 친절하지만 가까이하기 어렵다. 그래도 시칠리아에 대해 낯선 동양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영화 대부에서 시칠리아가 마피아의 본산으로 나왔다고 말했더니 영화는 영화일뿐 사실은 아니니 한번 오란다. 그럼 네로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가고 싶다. ㅎㅎ
샤워하고 오늘 하루 일과를 정리하면서 글을 쓰고 있자 발렝탕이 차 한잔 마시자며 다가오자 대화가 시작됐다. 나중에 폴란드 출신 캐나다인 에바가 대화에 합류하면서 시끌벅적해졌다. 말 많기로하는 3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인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기가 다녀온 나라들과 거기서 얻은 경험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말 많은 내가 경청할 정도니 이들의 수다 능력은 타노스급이었다. 그래도 낮선 동양인과 기꺼이 어울리려 하는 이들의 정성이 정겹게 느껴졌다. 그로 인해 별 흥미없는 프랑스와 캐나다 사람의 일상과 그들의 불만을 2시간동안 들어야 했다. 그런데 이들은 내일 순례길에 나서지 않는단다. 며칠 더 이곳에서 쉬겠다고 한다. 발렝탕은 스물일곱살이다. 그리고 나는 마흔으로 보인다고 한다. 착한 녀석.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