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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Nov 26. 2021

아테네, 아크로 폴리스 홀로 빛나는 도시

코로나19 방역 속 늘어나는 관광객 맞느라 혼란

리키베투스 언덕에서 내려다본 아테네 전경. 조명 밝힌 아크로 폴리스와 그 너머 에게해가 보인다

그리스 아테네에 들어왔다. 서양 문명의 뿌리를 보고 싶었다. 터무니 없이 싸게 항공편을 끊었다. 아테네 공항에 오후 6시 내렸으나 사위는 어두웠다. 공항 직원 안내로 X95 버스를 타고 1시간10분간 교통 체증에 시달린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아테네 첫인상은 1980년 서울 같았다. 제멋대로 뻗은 거리 양 옆으로 지저분한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도로는 오랫동안 정비하지 않은 탓인지 지저분하고 혼잡스러웠다. 도로 양쪽으로 차들이 주차되어 있어 도로는 더 비좁았고 버스가 그 길을 위태롭게 지나갔다. 건물들 사이 골목들은 후미지고 어두웠다. 옛 세운상가 뒷골목처럼 생긴 골목으로 들어서니 숙소가 나왔다. 기원전에 만들어진게 아닌가 싶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까지 올라갔다. 덜컹거리며 올라가는 이 엘리베이터가 당장 밑으로 떨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했다. 

리키베투스 언덕에서 본 아테네 야경

전 세계에서 온 배낭여행족으로 거실이 북적였다. 하루 방값이 10유로를 넘지 않은 곳이다보니 장기간 여행하는 이들이나 학생들이 많았다. 같은 사유로 같은 곳에서 만난 이들과 섞일 수 있어 좋았다. 체크인할 때 만난 숙소 주인 안드레아의 첫인상은 무서웠다. 덩치가 크고 비대한 중년 남자가 얼굴에 웃음 하나 띄우지 않고 조금 거칠다 싶을 정도로 숙소를 대충 안내했다. 체크인하면서 대화를 나누며 친하지니 여행객에 필요한 여러 정보를 세심하게 알려주고 이것저것 물으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친구가 되었다. 그 뒤로 십년지기처럼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냉장고 안 맥주도 하나 마시라고 한다. 냉장고가 자물쇠에 채워져 있는 걸 보면 분명 돈 받고 파는건데 그냥 먹으란다. 그러면서 얼굴에 어색한 미소도 띄웠다. 그것도 귀엽게. 

복원 복구가 한창인 파르테논 신전 앞에서

다음날 아침 일찍 나왔다. 아테네 여행의 출발지는 신타그마 광장이었다. 그리스어 신타그마는 헌법이라는 뜻이다. 그리스가 400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로부터 1830년 독립하면서 주권국가로서 서둘러 마련한 것이 헌법이다. 그들에게 헌법은 독립과 자유를 뜻한다. 광장에서 계단 위로 올려다보면 고풍스러운 건물이 버티고 서 있었다. 왕정 시절 왕궁이었으나 왕정을 폐지한 뒤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다. 건물 앞까지 가서 근위병들을 본 뒤 제우스 신전으로 향했다. 아크로 폴리스를 배경으로 제우스 신전 앞에 서 있는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에 닿았다. 하드리아누스는 이베리아반도 출신 황제다. 로마가 위대한 건 자기가 무력으로 점령한 속국에서라도 탁월한 인재가 나오면 자기 황제로 세울 수 있는 포용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베리아반도는 로마 황제 5명을 배출했다. 그 중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는 로마 전성기를 이룬 5현제들이다. 하드리아누스 시대 로마 영토를 최대로 확장되었다. 그 하드리아누스가 그리스인이 짓다만 제우스 신전을 완성했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리스 건축과 예술을 존중했다. 그는 아테네에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을 짓는 등 도시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테네 동심 신타그마 광장은 늘 북적인다

하드리아누스 개선문은 2층으로 만들어졌다. 1층은 로마 건축양식 특유의 아치가 돋보이는 문을 중심으로 대리석을 쌓아 올렸고 2층은 그리스 신전 모양으로 지어졌다. 이 개선문은 기점으로 아크로 폴리스 쪽으로는 구시가지 제우스 신전 쪽으로는 신시가지로 나누었다고 한다. 1층과 2층 사이에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 안쪽에는 “이곳은 테세우스(그리스신화 속 영웅)의 땅이다”라고 적혀 있다. 바깥쪽에는 “이곳은 테세우스 땅이 아니라 하드리아누스 땅이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이 개선문은 하드리아누스 사후 기원후 1세기 지나 세워졌다고 한다. 고대 로마인의 유머가 재미있다.  

아테네 아고라에서 보는 아크로 폴리스가 멋지다

제우스 신전은 실망스러웠다. 아테네 전성시대에는 가장 크고 웅장한 신전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104개 기둥 중 고작 10여개만 남았을 정도로 제 모습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파괴되었다. 그나마 서쪽에 많이 남아있는 기둥들은 보수하느라 보철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티고 있는 기둥 4개만 보고 나왔다. 볼게 별로 없었다. 언제가 제우스 신전이 복구되어 제 모습을 찾을 수 있기를 기원했다. 제우스 신전을 뒤로 하고 아크로폴리스로 향했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는 뜻이다. 가파른 길을 오르다보니 디오니소스 신전과 극장, 헤로도스아티쿠스 소극장을 거쳐 파르테논 신전 입구인 프로필라이온을 지났다. 디오니소스 신전은 돌 무더기만 가득해 그곳이 과거 신전 터였다는 건만 알 수 있었다. 디오니스소 극장은 객석으로 쓰인 돌 계단이 남아있어 원형 극장의 옛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는 길에서 디오니소스 극장을 내려다보며 과거 이곳에서 그리스 시민 4만여명이 모여 연극들을 관람하는 광경을 떠올렸다. 멀리 아테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그걸 배경으로 유리피데스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관람하는 건 멋진 경험일 듯하다. 

아테네 아고라에서 그나마 제 모습 갖추고 서 있는 헤파이토스 신전

헤로도스 아티구스 소극장은 지금도 연극이나 콘서트를 열 정도로 건재하다. 로마식 아치로 되어 있는 석조 건물들은 옛 모습을 간직한채 소극장 뒤에 병풍처럼 버티고 있고 움푹 들어간 무대 앞으로는 관람석이 계단 모양으로 부채살처럼 펼쳐졌다. 벼락부자의 자식이었으나 아테네 시민을 위해 여러 공공건물을 짓느라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해 인망이 높았다고 한다. 한여름밤 이곳에서 펼치는 연극이나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아테네 시민들이 부럽다. 소극장을 뒤로 하고 언덕길을 올라 신전 입구 프로필라이아에 도착했다. 입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오른쪽 언덕 위에 니케 신전이 옛 모습 그래도 서 있었다. 니케는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푸스 12신이 기간토스와 벌인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뒤 승리의 신으로 지위가 격상되었다. 니케는 전쟁과 승리의 신 아테네의 부하로 아테네 신 옆에 요정처럼 붙어다닌다. 


혼잡스러운 프로플라이온을 지나자 아크로폴리스의 주인공 파르테논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참 멋있다. 웅장하면서도 우아하다. 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오스만 투르크가 무기고로 사용하다가 폭발사고로 지붕을 비롯해 3분2를 날려버렸다고 한다. 아쉽다.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면 멋졌겠다. 복구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기저기 폭발의 잔해물들이 아직도 신전 주위에 덩그러니 널부러져 있다. 그 와중에 영국인 하나가 정문인 동쪽 페디먼트 조각상들을 훔쳐가는 바람에 복제품으로 정문에 삼각형 지붕 벽면을 장식해야 했다. 페디먼트 정문 조각상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스 정부가 돌려달라고 하니까 영국은 대영박물관에 보관하는게 안전하다며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해적의 후예다운 변명이다. 그리스가 하루빨리 자기 문화재를 돌려받기를 소원한다. 

아크로 폴리스의 프리 마돈나,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남쪽으로는 에릭테이온 신전이 자리한다. 에릭테이온 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신전으로 그리스에서 드물게 여러 신을 한 곳에 모셨다. 그리스인은 신전 하나에 신 하나만 모신다. 에릭테이온은 불문율을 깨고 여러 신을 모셨다. 이오니아식 기둥 4개와 페디먼트가 멋지게 서 있는 곳은 포세이돈 신전이다. 남쪽 낭떠러지에 접해 있다보니 아테네 아고라에서 올려다보면 아크로 폴리스 왼쪽에 선명하게 보인다. 포세이돈 신전이 셋방처럼 보인다. 메인 건물은 수호신 아테나를 모신 선전이다. 가장 눈에 띄는 곳은 신전 북쪽 뒤에 붙어있는 5명의 여인상이다. 여인상들은 머리로 신전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카리아티드라고 불리는 그리스 특유의 기둥 장식이다. 과거 그리스가 페르시아와 전쟁을 벌일 때 그리스의 패전을 염두에 두고 페르시아 쪽에 붙은 도시 국가들이 있었다. 아테네를 도시국가 연합을 이끌고 페르시아 침입을 2차례나 물리쳤다. 페르시아와 전쟁에서 승리하자 아테네는 배신자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카리아이는 가장 처참하게 당했다. 남자들은 몰살시켰고 여성들은 끌고와 노예로 부렸다. 그래서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신전 기둥을 카리아이 여인의 모습을 본 따서 만들고 신전의 무게를 영원히 지고 살게 했다. 뒤끝 끝장이다.  

에릭테이온 신전을 떠 받치고 있는 카이아이티드

전망대에서 아테네 곳곳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아테네 아고라의 잔해들이 널부러져 있고 그나마 제 모습을 지닌채 서 있는 헤파이토스 신전이 보였다. 그 맞은편으로 길게 뻗은 아고라의 스토아도 있다. 스토아는 기원전에 세워진 상가건물이다. 가로 20m 세운 120m 2층 건물이다. 지금은 아고라에서 출토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상당히 오랫동안 아크로 폴리스를 배회하다 프로폴라이아를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렸다. 아크로 폴리스에서 가까운 언덕으로 갔다. 전쟁의 신 아레스가 포세이돈 아들을 죽이는 바람에 재판을 받았다는 아레오파고스다. 사도 바울이 첫 복음을 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에서 올려다본 아크로폴리스가 근사하다. 

아레오 파고스에서 올려다본 아크로 폴리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려오는 언덕 길에 앙증맞게 붙어있는 동네 카페에 들렀다. 무뚝뚝하지만 착한 그리스 남자가 서빙하는 곳이다. 처음 봤을 때는 무심한 듯 주문 받더니 그리스 전통 샐러드를 허겁지겁 먹고 미토스 맥주까지 시키니 내 등에 손을 가볍게 올려더니 다른 테이블로 갔다. 겉바속촉(겉은 바싹한데 속은 촉촉한) 사람의 전형이다. 손님이니깐 보이는 친절이 아니라 무심한 태도 속에 마음이 가는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이 좋다. 진심이라 그런가. 


흐리아티키 살라타는 시켰다. 호리아티키 살라타는 양파, 토마토, 오이, 올리브를 올리브유로 섞은 뒤 맨 위에 하얗고 딱딱하고 그리스 치즈 덩어리를 올려 놓은 그리스 전통 샐러드다. 한국에서 올리브를 곁들인 마티니를 씹을 때마다 이걸 왜 먹나 싶었다. 올리브를 좋아하지 않다보니 올리브를 먹으려 하지 않았다. 호리아티키 살라타에 올리브 여러개가 섞여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검은 올리브 하나를 입에 넣었다. 짭쪼름 하면서도 혀 아래로 감기는 듯한 맛이 환상적이었다. 이래서 올리브를 먹는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샐러드 안에 든 올리브를 아껴서 먹었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아 그리스 커피도 주문했다. 그리스 커피 맛은 환상적이다. 크림이나 설탕 없이 커피 향과 맛을 즐겨보길 권한다. 스마트폰 충전하면서 그리스 토종 미토스 맥주를 시켰다. 미토스는 다른 맥주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아크로 폴리스 입구 프로필라이온

미토스 맥주에 취해 로마 아고라를 거쳐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으로 향했다. 로마 아고라에서는 과거 풍향계와 물시계로 쓰였던 바람의탑이 건재하고 하드리아누스 도서관에서는 한쪽 벽면에 세워진 코린트 양식의 기둥들만 살아 남아 도서관의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이곳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 갤럭시 노트20 핸드폰을 놓쳐 대리석 바닥에 떨어뜨렸다. 디스플레이가 깨지면서 화면을 흔들리더니 이내 나가버렸다. 택시를 타고 아테네 삼성 공식 서비스센터에 갔다. 서비스센터 직원이 유럽에서 쓰는 디스플레이는 한국산 핸드폰과 호환이 되지 않는다면 고칠 방법이 없다고 한다. 당혹스러웠다. 스마트폰 없이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도 모른다. 다시 택시 타고 도심으로 와서 중고 화웨이폰을 사서 유심을 옮겨 끼웠다. 그런데 PIN 번호를 모른다. 그것도 숙소에 두고 왔다.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택시 기사들이 행선지를 묻더니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그냥 가버렸다. 아테네 택시들은 승차거부가 일상이다. 1980년대 서울과 비슷하다. 기억을 더듬어 간신히 230번 버스를 탔고 숙소 근처에 내려 한참 헤매다 숙소로 들어왔다. 악몽 같은 날이었다. 

프로필라이온 지나 그 뒷쪽에서 찰칵

신전 앞노트북 컴퓨터에 있는 예약 관련 서류들을 일일이 프린트했다. 핸드폰에 담아 보여줄 수 없으니 프린트할 수밖에. 이참에 캐논M50 미러리스 카메라도 샀다. 택스 리펀드 받으니 한국보다 훨씬 쌌다. AB-ROAD 기고문에 사용할 사진은 10MB 이상이어야 한다. 화웨이 카메라로 촬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됐다. 언제가 사려 했는데 이참에 마련한거다. 지금 아테네 스타벅스에서 카메라 본체와 렌즈, 부속품을 조립하고 배터리를 충전하고 있다. 내 첫 미러리스 카메라다. 아니 악세사리가 아닌 제대로 된 카메라는 이게 처음이다. 보고 있는데 참 이쁘다. 작고 강력하다. 나 같은 카메라 초보에게는 딱 맞은 물건이다. 충전 끝나면 촬영하러 나가야겠다. 

아크로 폴리스에서 내려다본 제우스 신전

다음날 하드리아누스 도서관부터 당초 계획한대로 돌았다. 핸드폰이 부서지면서 중단한 아테네 시내 투어를 재개한 것이다. 아테라 아고라로 이용했다. 아테네 전성기 아고라는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자 정치 토론장이었다. 고개만 들면 웅장하게 솟아오른 아크로 폴리스 위에 에릭테이온 신전과 프로필라이온 입구에 서 있는 니케 신전이 눈에 들어온다. 에릭테이온 신전 너머로는 파르테논 남쪽 지붕이 보인다. 


그곳에서 시계를 보니 오후 4시에 가까워지고 있다. 리카베투스 언덕에서 아테네 석양과 야경을 보려면 서둘러야 했다. 겨울철이다보니 5시만 되도 석양이 지고 6시쯤이면 사위가 어두워졌다. 40분 가량 걸어서 산을 올랐다. 리카베투스 언덕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아크로 폴리스보다 훨씬 높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아테네 석양은 최고의 경치라고 한다. 숙소 주인 안드레아가 귀띔해준 거다.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한참 오르자 정상 위에 멋진 정교회 건물과 종탑이 있었다. 그곳에서 아테네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넓은 평원을 따라 하얀집들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아크로 폴리스 위 파르테논 신전도 눈에 들어왔다. 


아크로 폴리스 너머로 멀리 에게해가 보였다. 예개해 하늘에 구름이 잔뜩 꼈다. 노을이 아름답지 않을 듯했다. 잠시 뒤 빨간 기운에 하늘에 펴졌다. 그 기운은 에게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넋을 놓고 노을을 보다보니 주택가에 불이 하나씩 켜졌다. 아크로 풀리스 신전들도 조명을 밝혔다. 조명을 받아 노랗게 빛나는 파르테논이 아름다웠다. 쓰고 있는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바람이 강하게 불었지만 언덕 위에는 그 광경을 보러 올라온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그리스 북쪽에서는 신들이 살 것 같은 험준한 산들이 펼쳐진다

아테네는 아클로 폴리스가 전부다. 제우스 신전은 기둥 4개 빼고는 폐허에 가깝고 로마 아고라는 바람의 탑만 멀뚱멀뚱 서 있고 아테네 아고라는 헤파이스토스 신전 외 볼게 없었다. 아테네 시민들이 축제를 벌일 때 아크로 폴리스로 행군하기 전 출발지로 삼았던 폼페이온은 흔적만 남아있다. 아고라에 여기저기 신전과 건축물을 잔해들만 널부러져 있었다. 하드라이아누스 도서관은 입구 왼쪽 옆 코린트 양식 기둥만 아슬아슬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 어느 곳에서든 아크로 폴리스를 올려다보게 된다. 아테네 아고라 앞 식당에서 수블라키(그리스식 꼬치 요리)와 미토스 맥주 마시면서 오른쪽에 아크로 폴리스를 올려다보는게 비현실적이었다. 리카베투스 언덕에서도 아크로 폴리스만 홀로 빛났다. 그러니 아크로 폴리스를 봤다면 서둘러 아테네를 탈출해라. 혹시나 해서 아테네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볼만한게 없다. 


아테네만 벗어나면 그리스는 절경으로 가득하다. 남쪽 바다로 나가면 에게해와 이오니아해를 가득 메운 섬들이 즐비하고 북쪽으로 가면 신화 속 산들이 겹겹이 펼쳐진다. 아테네는 하루만 머물면 된다. 내일은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이 사는 산으로 갈거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잠적해야 한다면 아무도 몰래 숨어 살고 싶은 곳을 찾았다. 보자마자 반해 미친 사람처럼 동네 오르락내리락하며 돌고 식당에서 맥주를 곁들여 비프스테이크를 먹으면서 산속 마을로 퍼지는 석양을 봤다. 밤 늦게까지 마을 상점들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기념품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이곳 사람들은 아테네인들과 달리 모두 영어를 아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리고 아주 친절했다. 그리스에서 지금 스키를 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일 이곳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겠다. 기대하시라. 

사랑하는 이와 은둔하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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