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행복 찾은 퇴직 기자

23년 기자직 그만 두고 삶에 대한 열정을 되찾기 위해 세계를 떠돌다

by 이철현
23년 기자 직을 느닷없이 그만두다

지난해 8월 어느 햇살 좋은날 출근하자마자 데스크 회의를 주재하고 그날 다뤄야할 주요 이슈와 대형 기획을 점검했다. 데스크 회의를 마친 뒤 기자 23명이 인스턴트메신저(네이버 라인)를 통해 참여하는 부서별 편집회의를 지켜보았다. 오전 회의를 마무리한 뒤 편집국장 책상 앞에 앉아 듀얼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느 때와 다름 없는 일상의 날처럼 보였다. 겉보기와 달리 내 의식은 2주 전에 다녀온 일본 홋카이도를 정처없이 떠돌고 있었다.


2015년 2월 시사주간지 <시사저널> 산하 디지털 경제매체 <시사저널 이코노미>를 창간하고 2년6개월간 숨가쁘게 달렸다. 2017년 흑자전환하고 포털 뉴스콘텐츠 제휴심사도 통과해 안정적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시사저널 이코노미>가 자라는 동안 나는 번아웃(burnout·소진)됐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하듯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글쓰기 교육·훈련, 데스킹, 콘텐츠 기획, 협찬영업, 경력기자 채용, 조직관리, 콘퍼런스 기획 등 편집국 체제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내가 지닌 역량과 에너지 이상을 써야했다.

CD8F6353.jpg
CD8F6346.jpg
CD8F6363.jpg
<시사저널> 경제팀 기자 시절

출근하면 발제가 어떨지 걱정해야 했다. 오전에 기사가 나오지 않으면 초조했다. 다른 매체에 나온 기사와 별 차이 없는 기사들만 올라오면 불안했다. 데스킹 과정에 문장이 꼬이거나 오탈자를 보면 기자들을 혼내면서 목소리도 높였다. 콘텐츠 차별화를 위해 특집을 기획하고 태스크포스를 밀어부쳤다. 콘퍼런스를 기획하고 강사를 끌어모으는데 미국 보스턴부터 일본 오사카까지 동분서주해야 했다. 1년에 책 한권을 읽지 않고 주말에 골프만 치고 다니는 이가 대표이사다보니 편집 뿐만 아니라 행사 기획부터 광고 영업까지 고군분투해야 했다.


너무 많은 일을 동시에 진행하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퇴근 무렵 스트레스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스트레스를 푸는데 알콜에 의존했다.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몸이 경고의 신호를 보냈다. 이에 일단 쉬자는 생각으로 7월 여름휴가를 얻어 홋카이도로 떠났다. 삿포로, 비에이, 후라노, 오타루, 하코다테까지 홋카이도 전역을 돌아다녔다. 여행이 끝난 뒤 삿포로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는게 싫었다.


출근 첫날 회사 오는게 힘들었다. 여행 후유증으로 치부하고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업무에 복귀했지만 기사집배신시스템(CMS)에 오른 기사들을 데스킹하는게 곤욕이었다. 부장 하나가 휴가를 가는 바람에 데스킹 업무는 평소 2배로 늘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모니터 앞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기사는 데스킹보지 않고 그냥 넘겼다. 더이상 안되겠다고 판단하고 대표이사 책상 위에 사직서를 내고 회사를 나오며 휴대전화 전원을 껐다. 그렇게 23년 기자 생활을 끝냈다.

앙코로3.jpg
바이욘2.jpg
바이욘3.jpg
캄보디아 시엠립 앙코르 유적지에서 느긋함의 행복을 느끼다
북유럽부터 동남아시아까지 10개국을 돌아다니다

회사를 나오자마자 북유럽 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닐게이먼 저 <북유럽신화(Norse Mythology)>를 읽고 북유럽 신화에 심취했던 터라 오딘과 토르의 땅 스칸디나비아로 망명지 삼아 떠났다. 사직서 제출부터 비행기 탑승까지 나흘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뭐에 쫓기듯이 한국을 떠야 했다.


한달가량 북유럽 4개국(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을 돌아다녔다. 낯선 이와 맺은 인연에 설랬고 가끔씩 찾아오는 고독을 즐겼다. 북유럽 신화의 흔적을 찾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여행기를 작성했다. 사진 촬영도 게을리지하지 않았다. 평소 알고 지내던 카카오다음 콘텐츠 제휴 담당자와 협의해 브런치에 ‘북유럽신화와 함께 떠나는 스칸디나비아 3개국 여행’이라는 여행기를 실었다. 주제별로 정리한 여행기 10편은 편당 3만 명가량이 읽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북유럽 여행을 마치자 동남아시아(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태국)로 떠났다. 캄보디아 시엠립에서 게스트하우스에 만난 일본인 대학생 4명과 앙코르 유적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라오스 루앙프라방과 방비엥에서는 한국인 친구들과 천년 역사를 탐사했다. 베트남 하노이에서는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하자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베트남 응원단들과 함께 환호했다.


북유럽과 동남아시아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행에 대한 금단현상에 시달렸다. 다시 터키로 떠났다. 이스탄불부터 앙카라, 샤플란볼루, 카파도키아, 파묵칼레, 안탈리아 등 전역을 일주할 계획을 세우고 터키로 떠났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여행의 열병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잠복했던 여행의 갈망이 물꼬를 트자 걷잡을 수 없이 밖으로 쏟아진 듯했다.

IMG_5193.JPG
IMG_5124.JPG
IMG_5149.JPG
터키 카파도키아서 여행이 외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다
여행의 갈망, 기자 생활 내내 키운 열병

1995년7월부터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의 경제팀 기자로 일했다. 경제일간지 <파이낸셜뉴스> 산업부 기자, 중앙일보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기자로도 근무했다. 조선일보 산하 디지털경제매체 <조선비즈>에서는 기획취재부 데스크(부장)으로 일했다.


<시사저널> 기획취재팀 기자 시절 적군파 테러리스트 다나카 요시미를 태국 촌부리형무소에서 단독 인터뷰했다. 다나카는 1970년 일본 항공기 요도호를 납치해 북한으로 넘어간 적군파 테러리스트였다. 그가 북한산 초정밀 위조지폐를 동남아시아에 유통시켰다는 혐의로 태국과 미안마 접경지역에서 미국 재무성 산하 시크릿서비스에 체포됐다. 당시 인터뷰를 통해 다나카 요시미가 위조지폐범이 아니고 일본으로 밀입국하기 위해 위조 여권을 사고자 태국에 불법 입국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중국 트라이어드(삼합회)가 한국과 일본 위조여권을 만드는 태국 방콕 사무소에 잠입해 해외 위조여권 제조와 유통 과정을 담은 르포 기사를 쓰기도 했다. 삼성을 출입할 때 삼성구조조정본부 인적 구성과 업무를 상세히 보도했다. 현대자동차 10년 신차 개발계획을 밝혀내고 정몽규 당시 현대차 회장(현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단독 인터뷰했다.


수습기자 시절부터 데스크까지 23년간 일하면서 세계 32개국 100여개 도시를 돌아다녔다. 자동차업계를 출입할 때 독일 프랑크푸르트 모터쇼,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 파리 오토살롱 등 모터쇼가 열리는 곳을 취재차 방문했다. 정보기술(IT) 업계를 출입하면서 컴덱스와 CES가 열린 라스베이거스,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을 돌아다녔고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가 열린 스페인 바로셀로나를 찾았다. 기사를 마감하면 휴가를 내 짧게는 사흘, 길게는 일주일 가량 현지에 남아서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벳푸.jpg
046.JPG
독일 하노버.jpg
일본 벳푸와 독일 하노버, 나의 전성기

취재를 마치고 며칠씩 남아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것으로는 여행에 대한 갈증이 채워지지 않았다. 여행에 대한 갈증은 오랫동안 시나부로 열병으로 도졌는지 모르겠다. 쉰살이 되기 전에 퇴직하고 세계여행을 떠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말이 삶을 규정한다고 했나. 선후배에게 장담한 대로 지천명이 되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고 있다. 그리고 퇴직 기자는 길에서 행복하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미처 가지 못한 곳을 다녀온 이들의 여행기를 읽었다. 장 코르미에 저 <체게바라 평전>, 베르나르 올리비에 저 <나는 걷는다>, 김남희 저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와 <이 별의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저 <라오스에는 대체 뭐가 있는데요>, 김여울 저 <내성적인 여행자>, 임경선 저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등 문장력을 갖춘 직업 작가들의 여행기를 탐독했다.


지금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다. 배운지 3개월 지났다. 멕시코부터 쿠바를 거쳐 페루, 칠레, 파라과이,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까지 남미 전역을 돌아다니기 위해서다. DSLR 사진 촬영을 배우고 있다. 취재기자 시절 사진 기자가 따라다니다보니 사진 촬영을 배우지 못했다. 지난 1년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이 늘 아쉬웠다. 큰 맘 먹고 DSLR 카메라 캐논80D와 형아백통을 구입했다. 얼마전 정승익 저 <좋은 사진 만드는 사진구도>를 구입해 2번 읽으며 사진 촬영을 배우고 있다.


여행은 예기치 않던 방향과 속도로 삶에 대한 내 태도와 의식을 바꾸고 있음을 체감한다. 변화의 방향이 어디인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비워져 있던 가슴 깊은 곳이 채워지는 느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에세이 <나는 여행기를 이렇게 쓴다 >에서 “여행하는 행위의 본질이 여행자의 의식을 바뀌게하는 것이라면 여행을 묘사하는 작업(여행기) 역시 그런 것을 반영해야 한다”라고 적었다. 여행이라는 행위를 통해 바뀌는 삶의 태도와 의식을 여행기에 담아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시사저널 원년멤버.jpg 기자 초년병 시절 <시사저널> 원년 멤베들과 함께 간 제주도 우도. 왼쪽 세번째 선글라스 낀 이가 필자.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신화 속 여신들에게서 엿보는 북유럽의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