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장릉(長陵) – 무능한 왕이자 의심 많은 아버지
조선 제16대 왕 인조를 생각하면 인조반정,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죽음 등이 떠오른다. 인조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숙부인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지만, 광해군의 외교적 안목은커녕 정치력도 그다지 없는 임금이었다고 생각한다.
왕위에 오르기 전 능양군이라 불리던 인조는 선조의 많은 서손자 중의 한 명이었다. 인조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원군(定遠君, 원종으로 추존, 후궁 소생 중 5남)의 첫째 아들로 1595년에 태어났다. 1615년 신경희의 옥사로 아우 능창군(당시 17세, 선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가 될 뻔했던 신성군의 양자로 입적, 대북파의 견제를 받음)이 죽임을 당하자 아버지 정원군은 화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능양군은 빈소에서 통곡하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인조가 반정 당일(1623년 3월 13일), 친위부대를 이끌 만큼 거사에 깊이 개입했다는 것을 인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중종도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인조반정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중종은 반정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이복형인 연산군을 몰아낸 공신들에 의해 추대된 경우였고, 인조는 스스로 세력을 규합해 반정을 일으켜 숙부인 광해군을 쫓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것이다.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대북 정권이 들어서면서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던 서인들은 인조반정을 계기로 다시 권력을 쟁취하였다. 인조로 즉위한 능양군과 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은 광해군 일가를 강화도로 유배 보내고, 이이첨, 정인홍 등의 대북 세력을 처단한 뒤 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인조반정의 본질은 대북의 독주에 대한 서인들의 반발, 즉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대의명분으로 삼은 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살제폐모(殺弟廢母), 즉 형제를 죽이고 어머니를 폐했다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명에 대한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교분을 맺었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인조반정의 명분을 준 것은, 광해군 자신이었지 않나 싶다. 충효를 전면에 내세운 나라에서 이복이기는 하지만 아우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이기는 하지만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여, 반정 세력에게 빌미를 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서인 세력은 종묘사직을 바로잡겠다며 반정의 명분을 세웠으나 그것이 무색하게 다시 권력에 안주하고 전횡의 조짐을 보였다. 여론은 반정세력에게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단지 군주만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없다는 냉소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인조 조 초기에는 각종 모역 사건과 고변이 끊이지 않았다.
1624년(인조 2) 1월 반정공신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반정 당일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김류를 대신해 반정군 대장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뒤늦게 김류가 나타나는 바람에 대장 자리를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이괄과 김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논공행상에서도 이괄은 반정에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여 2등공신으로 책봉되고,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가 평안병사 겸 부원수가 되어 영변으로 가게 되었다.
이괄은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이괄을 자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의 아들과 한명련, 기자헌 등이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을 당한 것이다. 당시 정국이 어수선해 이런저런 고변이 난무하던 차였다. 인조는 일단 자초지종을 듣겠다며 이괄의 아들과 기자헌 등을 서울로 압송할 것을 명했다. 이에 화가 난 이괄은 부하 장수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에게는 오직 아들 한 명밖에 없는데 그 애가 잡혀가서 장차 죽임을 당할 것이니 어찌 아비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일이 이미 급해졌으니 남아가 죽지 않는다면 몰라도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 어찌 능히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겠는가. - 《연려실기술》 권 24, 인조 조 고사본말>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인조는 공주까지 피란 갔다. 반란군 때문에 왕이 도성을 비우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인조를 따르는 백성은 거의 없었다. 선조에 이어 두 번이나 임금이 도성인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을 경험한 백성들은 조선의 국왕은 언제든지 백성을 버리고 도성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안산 전투에서 이괄의 부대가 패함으로써 다시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괄은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괄의 난은 이렇게 끝이 났다. 이괄의 난은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와 서인 정권의 불안정성을 보여 주었으며, 무엇보다 중앙 병력의 허술함을 드러냈다. 이괄의 난 등으로 인해 민심이 등을 돌리자 조정에서는 거꾸로 기찰을 강화하여 반대파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했다. 이와 같은 조선의 불안한 내정은 결과적으로는 장차 닥칠 엄청난 환란을 조장하고 있었다.
인조와 서인 정권이 들어선 후 조선의 외교 정책은 광해군이 고수한 중립외교 정책을 버리고 친명배금 정책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후금을 자극했다. 결국 1627년(인조 5)에 후금의 태종은 3만 대군을 보내 조선을 침략했다. 이것이 정묘호란(丁卯胡亂)이다.
인조는 장만을 도체찰사로 임명해 대항하도록 했다. 그러나 후금군은 의주성을 함락한 데 이어 평산까지 진격해 왔다. 이에 놀란 인조는 강화도로, 세자는 전주로 피란 갔다.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은 더이상 진격하지 않고 조선에 화의를 요구해 왔다. 결국 정묘호란은 발발한 지 2개월 만에 두 나라가 '형제의 맹약'을 맺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후금은 1636년(인조 14)에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 군주의 호칭을 황제로 바꾸었다. 그리고는 조선에 '형제'의 관계가 아닌 '군신'의 관계를 요구해 왔다. 이에 대해서 조선의 조정은 청과의 관계를 화평하게 이어가자는 주화파(主和派)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척화파(斥和派)로 갈렸다. 분위기는 척화론 쪽으로 기울었다. 전쟁에 대한 대비도 없이, 전쟁에서 싸워 이길 힘도 없으면서 무모하게 반청의 목소리만 높였다. 입으로만 부르짖는 척화론이었다.
1636년(인조 14) 12월, 청나라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왔다. 바로 병자호란이다.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 지 6일 만에 서울 근교까지 치고 내려왔다. 조선 조정이 미처 대비할 시간도 없었다. 도성이 함락될 위험이 있으면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미 청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점령해 버린 뒤였다. 피란길에 나섰다가 다시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때 반정공신이자 대표적인 주화파인 최명길이 나섰다. 최명길은 청군의 진영을 찾아가 회담을 요청했다. 그렇게 최명길이 시간을 끄는 동안 인조는 도성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45일간에 걸친 항전이 시작되었다.
12월 15일,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후 청군은 즉시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송파동 일대에 있던 나루)에 진을 쳤다. 그리고 화의를 제안하면서 청의 주력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었다. 인조도 각지의 근왕병들이 도착할 때까지 산성에서 버티고 있었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식량도 점점 떨어져 갔다. 남한산성 항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군사 1만에, 한 달간 버틸 양식밖에 없었다. 그 사이 각지의 근왕병들도 모두 궤멸하고 반격의 기회마저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강화도마저 함락되어 미리 피란 가 있던 왕비와 왕자들, 관료들과 그 가족들이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어 삼전도로 압송되어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척화파를 청군으로 잡아 보내라고 시위했다.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인조는 청의 요구대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척화파들은 항복만은 안 된다며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1637년(인조 15)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로 향했다. 그곳에는 청 태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조는 청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의식을 치렀다. 치욕의 순간이었다. 항복과 더불어 조선은 청나라에 막대한 양의 공물을 바치고 수많은 인질을 보내야 했다. 인질 중에는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로소 청나라 군대는 물러갔다. 그러나 조선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되었다. 1639년(인조 17)에는 청의 요구로 삼전도에 청 태종 공덕비를 세움으로써 치욕의 역사에 정점을 찍었다.
인조는 병자호란의 패배로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예식을 행하고 나서 평생 청나라에 앙심을 품었지만, 힘이 없어 반격을 시도하지는 못하였다. 그 대신 그 울분을 볼모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장남 소현세자 부부에게 쏟아냈다.
굴욕적인 삼전도 항복 이후 반청의식(反淸意識)이 더욱 고조된 상황에서 인조는 청나라가 혹여 자신을 내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대신 세울까 걱정했다. 그러던 중 1645년(인조 23),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8년 만에 귀국했다. 소현세자가 귀국하자 인조는 더욱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인조의 배척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병을 얻었다. 학질이라는 진단을 받고 침을 맞았으나 소현세자는 사흘 만에 갑자기 죽어 버렸다. 이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의문점이 많았다. 그리고 세자의 장례라고 하기에는 박대에 가까울 정도로 간소하게 장례를 치렀다.
소현세자가 죽은 후 종법대로 하자면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 석철을 세손으로 책봉하고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그러나 인조는 원손이 어리고 자신이 언제 죽을지 모르니, 소현세자의 두 아우인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중에서 세자를 간택하겠다고 했다. 인조의 뜻에 따라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은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던 중 사약을 받아 죽었고,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소현세자의 두 아들도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소현세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만이 아니라 그 후에 일어난 소현세자 가족의 일들로 인해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소현세자 부부와 아들들의 불행은 결국 인조의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왕위에 올랐으나 명분도, 국익도 세우지 못했던 인조. 그는 1649년(인조 27) 5월에 54세의 나이로 죽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있는 장릉(長陵)이다.
전란을 통해 왕의 재목으로 거듭나는 광해군과 소현세자와 달리 그들의 아버지들은 본인들의 안위에만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진정한 왕으로 거듭났다면 그 후의 조선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