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푸드
로컬푸드에 출하하러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내 손으로, 아니 우리 손으로 생산한 농산물을 누군가 자발적으로 돈을 주고 산다는 것, 그 자체에 흥분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1500원짜리 호박 한 개가 팔릴 때도 있고, 어떤 날은 10000원짜리 풋땅콩이 팔릴 때도 있다. 정말 어떤 날은 대박치기도 하고, 며칠간 공칠 때도 있다.
우리가 로컬푸드에 간다니까, 아주버니가 뭐 사러 가냐고 물었다. 사러 가는 게 아니라 팔러 가는 거라 했더니, 깜짝 놀랐다. 대체 어떤 것을 파는 거냐, 어떻게 파는 거냐, 궁금해 죽겠다는 듯이 침까지 튀기며 질문을 연속으로 해댔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직접 보는 게 궁금증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주버니, 그렇게 궁금하면 같이 가서 보시는 것은 어떠세요?” 했더니, 옆에 있던 남편도 “그래, 형, 같이 가. 갔다 오면서 한식 뷔페식당에 들러 밥도 먹고.” 하였다.
차를 타고 같이 가는데도, 아주버니는 “나는 자꾸 로컬푸드에 간다고 해서 뭐를 그리 자주 사려고 가나, 했다.” 하면서 믿을 수 없다고 했다.
로컬푸드에 도착해서 나는 가져간 농산물에 바코드가 찍힌 가격표를 붙이고, 남편과 아주버니는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가격표를 다 붙이고 매장 안에 들어갔더니, 아주버니가 내 곁으로 다가와서, “대단해, 아구, 대단해. 완전 대박!” 하면서 추켜세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하도 추켜세우기에, “얼마 안 돼요.” 했다. 아주버니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내 이름이 찍힌 농산물을 당당하게 판매하는 것, 그것 자체가 대단한 거라고 했다. 아마추어 농부가 돈을 받고 팔 수 있도록 농산물을 키웠다는 것이 대단한 거라며 거듭해서 말했다. ‘대단하다’는 소리를 아마 스무 번은 더 했을 것이다. 형님한테 보여주려고 핸드폰으로 사진까지 찍었다고 했다. 아마 깜짝 놀랄 거라면서. 얼마나 감탄하고 또 감탄하시는지, 어깨심을 넣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깨가 점점 올라갔다. 뻐근할 정도로 올라간 어깨는 더 올라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00아빠가 고생이 많지요.” 하면서 남편에게 그 공을 좀 돌려놓았다. 그러자 아주버니가, “아니야, 아니야, 팔 수 있게 포장한 것은 다 00엄마잖아.” 하면서 다시 그 공을 나에게 돌려놓았다.
“정말 대단해! 00엄마, 나 오늘 완전 감동 먹었어.”
결혼해 이때껏 시댁 구성원으로 살아오면서 이런 극찬에 가까운 칭찬을 받은 적이 단언컨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로컬푸드에 농산물을 출하하여 판다는 것에, 이토록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시다니….
아주버니의 칭찬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도 이어졌다. 나는 아주버니의 좀 과하다 싶은 반응이 이해될 것 같기도 했다. 이제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아주버니는 퇴직 후 농사일을 할 의향을 갖고 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아주버니 역시 놀면서는 못 산다. 태생이 그렇다. 나는 고생길을 자처하고 나선 두 형제를 짠한 마음으로 번갈아 보면서, “아주버니, 희망이 보이지요?” 했다.
“맞아.”
“그래요. 돈 따지지 않으면, 판매처는 있어요.”
아주버니도 남편과 비슷한 성격이라, 농산물을 생산한다고 해도 지인 판매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 집도 지인 판매는 내가 나서서 한다. 나도 지인 판매가 편한 것은 아니다. 괜히 부탁하는 것 같고, 을이 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 불편하여 지인 판매를 줄이고, 점차 로컬푸드와 공판장을 통한 판매로 갈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아주버니에게 ‘아주버니는 남편과 성격이 비슷해 지인 판매를 하지 못할 것이나 형님이 아는 사람이 많으니, 지인 판매가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인 판매에만 의존하면, 상처받을 수도 있고, 관계가 어그러질 수도 있고, 주문이 안 들어오면 당황할 수도 있으니, 다양한 판로를 확보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아주버니도 내 말에 동감한다고 했다.
아주버니와 헤어지고 오면서, 예전에 내가 로컬푸드에서 보았던 희망을, 오늘 아주버니도 보았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소하게 농산물을 키우는 사람들에게 로컬푸드는 희망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컬푸드에 가는 길은 늘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