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이 아닌, 고마움으로 기억되길 바라며
여행의 끝.
우여곡절 끝에 여행을 떠났다. 여행은, 그렇게 나쁠 리 없다. 특히나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잘 꾸며진 공간으로 가는데. 그런 어설픈 확신 하나 가지고 이 여행을 준비했다. 좋은 공간으로 가니까, 다 좋을 거야. 괜찮을 거야.
결론적으로 말하면, 좋았다. 특별한 걸 하지 않았지만, 좋은 공간이 전반적으로 모든 순간이 여행임을 깨우쳐주었고, 단 하루였지만 찬란한 날씨 아래 시간여행을 온 듯한 절, 그리고 야생과 사람의 손길이 적절히 섞인 산책코스 정도가 하이라이트였달까. 그렇지만 이 모든 기억은 기록하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휘발될 테니까, 남겨두는 기록.
출발 전. 냉장고를 통째로 옮길 듯이 짐을 싸 댔지만, 너무 많은데? 가 아니라, 더 가져갈 건 없을까가 고민되었던 짐 싸기. 선별 진료소까지 들러가며 의지를 불태웠던 출발. 강원도에 도착하던 순간부터 이미 일상에서 지나가버린 봄이 다시 시작되는 듯했던 신비함. 생각만큼이나 좋았던 숙소의 첫인상. 냉장고를 그득하니 채워놓고 처음 만들어 먹은 애플망고 샐러드. 닭고기 버전과 돼지고기 버전을 동시에 시식하게 된 래터스 랩. 숙소를 둘러 만들어 놓은 산책코스. 폭포와 계단, 잘 꾸며놓은 정원과 작물들이 추운 날씨를 잊게 만들었던 시간. 끝난 줄 알았던 저녁이 다시 시작되었던 야밤의 삼겹살 파티. 그리고 마치 계획된 듯 워크숍을 온 듯 시작되었으나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준 스터디 타임. 자본주의 시장의 화폐가치로 시작해 AI가 가져올 기술 혁신의 속도가 대체해버릴 경제학의 3대 요소(토지, 노동, 자본)중 노동은 우리 아가들이 최초의 기본소득 세대가 될 것 같은 우려(?)를 가져오고. 가치의 저장 수단으로써의 암호화폐를 이해해보려는 발버둥은 업비트 앱을 깔기에 이르렀던 그 밤.
그러나 좋은 숙소 잡아놓고 바닥에서 자는 미련함 덕에 모두가 뒤척였던 첫날밤. 그 덕에 새벽 6시부터 시작된 둘째 날 하루. 맛있는 된장국, 하릴없이 여유로웠던 오전.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신비 아파트 노래를 흥얼거린 후에야 하루가 본격 시작된 오전 11시. 모두의 손가락을 새우깡으로 만들었던 냉동새우 2kg 까기. 올리브를 듬뿍 넣은 탱탱한 새우살의 감바스와 생각보다 반응이 별로였던 두부면 샐러드 - 건강한 음식을 찾는다고 꼭 건강한 맛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
오후 느지막이 되어서야 모처럼 모두가 나선 리조트 산책길. 그러나 난데없이 쏟아지던 소나기. 굽이굽이 이어지던 소노 패밀리 숙소들과 온갖 반려견의 천국이 인상 깊었던 소노 펫 숙소. 어김없이 이어지던 산책길 나물 채취 끝에 도달한 골프장 뷰의 천장이 높고 한적한 카페. 와구와구 빵을 먹는 아가들과 함께 기대보다 맛있었던 초코케잌을 곁들인 커피타임. 그러나 그 와중에 가장 좋았던 시간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패션잡지를 정독하는 일. 아가들을 위한 닭고기 야채 볶음, 먹고 또 먹어도 손을 멈출 수 없었던 에그인헬, 그러나 마무리는 참치김치볶음에 밥도 모자라 결국 다시 시작된 삼겹살 타임. 여행의 마지막 밤은 역시, 알코올과 함께하는 자아성찰(?)의 시간. 가족 간의 대화란 역시 외부 중재인이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며, 마무리는 맛난 와인과 치즈, 이번 여행 내내 여기가 동남아인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족했던 망고와 함께.
부족한 잠과 늦은 회동의 후유증으로 10시 반에야 시작된 셋째 날. 오랜만에 맛보는 엄마가 끓여준 김칫국은 너무나 맛있었지만 늦게 일어난 죄책감을 더하고. 널어놓은 빨래는 냉장고에, 신발은 서랍장에, 아이스크림 한통을 다 해치운 아가들의 만행을 수습하던 아침은 설거지하는 엄마를 보다 결국 이성을 잃게 하고. 입구에서부터 가족등반은 어림도 없다며 우리를 가로막은 팔봉산 앞에서 이렇게 불행으로 가나 불안이 엄습하였으나 이렇게 여행을 망칠 수는 없다는 강력한 의지로 나선 수타사가 우리를 구원하였으니. 완벽한 날씨와 곳곳에 피어있는 노랑, 흰색, 분홍, 초록의 향연. 강원도 산나물 채취의 소원을 성취하며 걸었던 속이 뻥 뚫리는 산책길. 우굴우굴한 올챙이 연못. 끊임없이 뻥튀기를 집어먹던 우리는 미쳐 인지하지 못했던 배고픔의 미안함. 그리고 마지막 저녁 만찬.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와 토마토 계란 모차렐라 버섯볶음, 곤드레 나물밥에 갓따온 생나물들, 두릅전, 각종 밑반찬까지 진수성찬. 강원도 산바람도 안중에 없이 실컷 물놀이를 해댄 덕에 꿀떡꿀떡 저녁을 먹던 아가들을 끝으로 짐을 싸고, 너무나 감사했던 밤 8시 체크아웃과 함께 여행 마무리.
이번 여행이 얼마나 좋았냐 묻는다면, 집에 가는 길에 헤어짐이 슬퍼 한 시간이 넘도록 끅끅대며 울어대던 아들의 울음으로 대답을 대신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안 한 듯 하지만 써놓고 보니 이렇게나 많은 일을 많은 것을 먹어가며(?) 보냈던 여행. 전쟁터에서도 사랑은 꽃피듯, 다사다난한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우리 세 가족, 이만하면 추억 한 장 잘 꽃 피웠다 믿으며 다음을 기약합니다. 서로에게 표현할 마음은, 미안함이 아니라 고마움인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