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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은정 Jul 02. 2019

프롤로그 1.  

20년 만에 부친 편지

택배에 담긴 편지를 보고 놀랍고 
               반가워 말을 잃었다.                 
 딸아이의 편지에 눈물이 난다. 고맙구나
지금 모임이 있어 일단 문자만 보낸다.
저녁 모임이 마치면 전화할 것이다.   
최은정. 고맙다


 퇴근 후, 문자 한 통이 왔다.  발신인 : 용재쌤   2019/ 5/ 15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이 왔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공식일정을 소화하고 나면, 5월 15일 스승의 날이다.

무심코 들른 상남동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카네이션 브로치와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보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용재쌤... 브로치를 들었다 놓았다. 손수건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한 참을 서성거렸다. 그리고 바구니에 물건들을 넣고 편지지 코너로 향했다. 너무 길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짧지도 않은 딱 적당한 길이의 글을 쓸 수 있는 카드 한 장이어야 한다. 카네이션이 그려진 손바닥 크기의 카드를 집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편지를 썼다. 구구절절 살아온 이야기를 쓰기엔 턱없이 부족한 카드였다. 좀 더 큰 편지지를 고를걸 그랬나? 아니다. 짧은 글로 인사를 하고, 만나서 이야기하는 편이 더 낫다. 손바닥만 한 카드 한 장에 20년의 시간을 담진 못 했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꾹꾹 눌러 넣었다. 상자 속에 손수건을 넣고, 그 위에 편지와 카네이션 브로치, 그리고 KBS 작가라는 직함이 적힌 명함 한 장도 넣었다. 뭔가 부족해.


 5살 아들과 11살 딸을 데리고 쿠키를 만들러 갔다. 엄마의 숨은 의도는 알리 없는 아이들은 신이 나서 쿠키를 만들었다. 고사리손으로 만든 쿠키는 의외로 맛이 있었다. "와~ 최고로 맛있는걸~! 근데, 강민아. 나현아. 너희가 만든 쿠키 몇 개를 엄마의 선생님한테 좀 드려도 될까?" 사실,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걸 아무에게 쉽게 내어주진 않는다. "어떤 선생님?"  "음... 엄마가 작가가 될 수 있게 만들어주신 선생님이야"  "그래! 좋아" 쿨한 답변을 듣고서야 가장 맛있게 구워진 쿠키 몇 개를 봉투에 담았다. 쿠키가 깨지지 않게 공기를 충전한 비닐에 한 번 더 포장을 하고 편지가 든 상자에 넣었다.

그렇게 곧, 부쳐질 것 만 같았던 상자는 며칠간 책상 위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그리고 스승의 날이 되었다. 오전 원고를 마무리하고, 시계를 보니 11시 30분. 우체국 당일 등기 우편 마감 시간까지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용재쌤과 연락을 하고 지내는 언니와 주고받은 카톡이 떠올랐다. '내년이 정년 퇴임이시래' 올 해가 교단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스승의 날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부산까지 오늘 밤늦게라도 도착할 수 있는 당일 빠른 등기 우편은 상남동 우체국 밖에 접수가 안된다. 열심히 차를 몰고 상자를 들고 우체국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규격상자로 옮겨 담은 뒤, 주소를 적고, 접수대로 갔다.


"오늘 밤에 도착할 수 도 있습니다."

"네. 오늘 안에만 도착하면 됩니다."


다행히 택배는 선생님의 근무시간 안에 도착했고, 문자는 저녁시간이 될 무렵 내게 왔다.


택배에 담긴 편지를 보고 놀랍고 반가워 말을 잃었다.  딸아이의 편지에 눈물이 난다. 고맙구나.  지금 모임이 있어 일단 문자만 보낸다.  저녁 모임이 마치면 전화할 것이다. 최은정. 고맙다   


 폰을 집어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몇 시간 뒤면 선생님에게 전화가 걸려올 것이다. 전화기를 잠시 끄고 싶을 만큼 두렵고 또 떨렸다. 마치 성적표를 들고 엄마의 방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잠시 뒤, 진동이 느껴졌다. 손의 떨림이었나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강한 울림이었다.

 "은정아!" 한 마디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은정아, 고맙다. 2019년 5월 15일. 오늘을 절대 잊을 수 없다. 감사한 날이다. 참 고맙다" 난 죄송하단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20년간 한 번 도 연락하지 못했던 죄스러움. 왜 난 그토록 불량한 제자가 되어 버린 걸까?


1999년도는 밀레니엄 시대가 곧,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감과 종말이 올 거라는 터무니없는 소리가 난무하는 혼돈의 해였다. 그리고, 난 고3 수험생이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는데 난 그다지 치열하게 고3을 보내지 않았다. 공부를 잘해서는 절대 아니다. 내신은 딱 중간, 모의고사 성적은 4년제 턱걸이 수준이었으니... 남들보다 덜 자고 더 해야 했다. 하지만, 난 혼자 이어폰을 끼고 유키 구라모토의 피아노 연주를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으면서 시를 썼다.  어떤 날은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를 들으며 세상의 모든 우울함과 낭만과 멋짐과 슬픔이 제 것인 양 똥폼을 잡았다. 시심이라는 동아리 활동을 하며 시화전도 열고, 시낭송회도 하고, 그야말로 문학소녀로 불려지길 원했다. 시심 25기라는 추억은 나의 메일 주소와 아이디로 아직 남아있다. 여하튼, 그 시절 문학을 좋아하셨던 용재쌤은 나의 가능성을 발견해줬고,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을 선물해주셨다. 성균관대학교 백일장에서 상을 받아온 날엔 교사연구실에서 깜짝 파티를 열어주셨다. 투박한 책상 위 하얀 생크림 케이크는 정말 달콤했다. 선생님의 칭찬에 난 정말 고래춤을 추었던 것 같다. 용재쌤의 과목인 역사 시간엔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시험기간에 역사가 들어있는 날엔 다른 과목은 제쳐두고서라도 역사책만 들여다봤다. 덕분에 초라했던 역사 성적은 점점 올라갔고, 반면 같은 날 시험을 쳤던 다른 과목 성적표엔 비가 내렸다. 백일장이란 백일장은 다 나가다시피 했고, 떨어지기도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어느 날, 용재쌤이 조용히 날 불렀다. 내 성적이 간당간당하니,  백일장 입상 기록과 추천서로 수시를 넣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정보를 주셨다. 그리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선배의 연락처도 알려주셨다. 그렇게 난 수능성적과 상관없이 지역의 한 대학교 국문과에 무사히 시로 합격했다. 12월 31일 23시 59분.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다. 10.9.8.7.6.5.4.3.2.1. 종말은 오지 않았고, 난 밀레니엄 학번 신입생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대생 최은정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선생님 일요일 시간 괜찮으세요? 부산 내려가는데... 남산동 팔각정 아시나요? 거기서 점심 같이 드셔요~!  
은정아. 그래 얼굴 한번 보자. 그런데 내 모습이 머리 다 빠지고 얼굴은 주름 투성이라 걱정이다.


선생님과 만나기로 한 날. 마침 선생님 댁이 부산 친정집 근처라 부모님과 자주 가던 오리백숙집으로 미리 예약을 했다.  난 약속 시각보다 10분 일찍 도착했고, 선생님은 5분 늦는다는 문자가 왔다. 식당의 문이 열릴 때마다 난 안절부절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은정아!" 선생님이 부르셨고, 2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난 그 시절 여고생이 되어 버렸다.   


선생님, 시를 못 쓰겠더라고요. 소녀시절 감성도 사라지고. 모르고 썼던 것 같아요. 시가 그렇게 어려운 건 줄 정말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런데, 몰라서 잘 썼던 것 같기도 해요.  시는 순수하잖아요? 시를 쓰지 않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서 연락을 못 드렸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한 해 두 해 지나다 보니 20년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은 결혼도 하고 애가 둘이나 있는... 곧 마흔을 바라보는 제자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선생님 저 이만큼 잘하고 있으니 또 칭찬해주세요'라는 듯 자랑을 늘어놓았다. KBS에서 작가 일을 15년 동안 하며 다큐멘터리도 쓰고 지금은 토론 프로그램 메인을 맡고 있고, 마을에선 사회적 협동조합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등 시인이 되지 못 한 돈벌이 작가의 시시콜콜한 무용담에 "참 열심히 살았구나! 대단하구나!" 하고 맞장구 쳐주었다.


힘들었겠구나. 그만큼 하느라 참 힘들었겠구나. 고생했다. 은정아. 
선생님은 힘든 것보다 좀 편하게 살 길 원했는데. 말은 안 해도 힘듦이 느껴진다.
그래도 지금 하는 일이 좋아 보이고, 또 행복해 보여서 참 좋구나.
열심히 살았구나. 행복한 것 같다. 그러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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