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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수집가 Nov 11. 2019

우리를 찾아 떠나는 지하철 여행

연극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



우리를 찾아 떠나는 지하철 여행


 삶이라는 좌표에서 내 삶은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원하는 방향대로 잘 흘러가고 있는 건지, 내가 바라는 삶에 몇 걸음이나 가까워졌는지 말이다. 이처럼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끊임없이 물어왔다. 그런데 이러한 광범위한 질문을 타인과 함께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혼자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마음에 드는 책 속의 문장을 발견하고, 글을 써 내려가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천천히 해결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지하철 칸과 칸 사이의 연결 통로가 존재하듯이 나와 타인은 관계와 역사, 문화, 일상 속 가치관 속에 얽혀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은 ‘연결’되는 지점에 주목했다.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것을 통해 어떻게 지금의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한국, 홍콩, 일본 출신 배우들이 모여 일상에 균열을 일으킨 사건과 계기를 공유하며, 그들의 삶과 사회에 대해 공통적으로 갖는 문제의식을 보여주었다. 이 과정을 통해 서로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들이 함께 타고 가는 지하철 여행의 종착역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한국·홍콩·일본 공동제작 프리프로덕션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은 한국-홍콩-일본 공동제작 프리 프로덕션으로 2017년부터 수차례의 워크숍을 거친 뒤 2018년에 쇼케이스로 선보인 작품이다. 이들은 프리 프로덕션의 무대화 방식에 대해 토론하며 서로 현재 주목하고 있는 10개의 이슈를 선정했으며, 워크숍을 통해 도출된 공통점, 연극, 혁명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장면들을 선보였다. 각국의 창작자들이 삶과 사회에 가진 경험과 문제의식을 반영해서 만든 연극에서 다음과 같은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소리가 먼저 도착하고
뜻이 나중에 도착한다.

 먼저 인상적이었던 건 ‘언어’였다. 한국, 홍콩, 일본 공동제작이기 때문에 연습부터 공연까지 어떻게 소통해왔으며, 관객들에게 어떤 언어로 전달할 것인지 궁금했다. 내한 공연처럼 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어 자막으로 처리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국제공동제작을 할 때 나라를 막론하고 영어로 소통하게 되는 데 반해, 워크숍 과정부터 공연까지 각자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이번 작업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소리가 먼저 도착하고 뜻이 나중에 도착한다.” 이는 극 초반에 등장했던 배우들의 대사였다. 각자의 언어로 소통을 해 나가는 가운데 언어의 소리, 리듬, 의미의 전달이 만들어내는 시차가 마치 돌림 노래처럼 모두를 연결했고, 서로를 이해해가는 중요한 과정임을 보여줬다. 가령 홍콩, 일본 배우가 자국어로 말하면 한국 배우가 한국어로 번역을 했다. 또는 같은 상황을 일본, 한국 배우 그리고 홍콩, 한국 배우로 나눠 두 번 재연함으로써 의미를 번갈아 해석할 수 있었다. 특히 자국어로 말하는 대사를 의미보다 소리와 리듬에 집중하여 듣게 되니 훨씬 감각적인 체험처럼 느껴졌다.


 이 작품에서 언어의 장벽은 크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가 소통하는 데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통역하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더디게 흘러가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알아듣지 못해도 눈을 바라보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 한 가지 단어에 대한 각 나라의 발음을 알려주며 서로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모습, 언어적 표현보다 비언어적 표현으로부터 나오는 진정성과 생동감에 감동을 느꼈다.



'우리'라는 공통분모를 찾아서


 타인을 알아가고 가까워지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공통점을 찾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 춘계 공연으로 참여했던 <말 mal>이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테이블 작업과 워크숍을 함께했던 공동 창작 작품이었다. ‘나’를 주제로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주된 정서, 자기소개 등을 공유했고 과정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며 유대감을 형성하기도 했다. 서로의 삶의 이력을 모르는 상태에서 같은 취향이나 경험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친밀감을 느꼈고, 급속도로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 또한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기 위해서 같은 과정을 밟았을 거라 생각한다.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하던 승객들이 한 명씩 자기소개를 하는 장면을 보여줬고, 옆자리에 앉은 배우들과 워크숍을 통해 공유했던 공통점을 나열하는 장면도 있었다.


 모두는 1980년대 생이며, 아시아의 도시에서 살아가며 연극을 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슬램덩크, 영웅본색, 농구선수, 학창시절 체벌, AV를 접한 시기, 핸드폰 기종, 흡연 여부, 반장 경험 등 다양한 공통점을 나열한 뒤에 즐겨봤던 세일러문의 주제가를 각 나라의 언어로 부르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관객들도 배우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마음을 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서 삶의 이력과 취향, 구체적인 경험 등을 알아갈 필요가 있다. 처음 보는 낯선 배우들이 스스로를 여과 없이 표현했고, 다른 나라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서로가 사회적, 문화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라왔는지 알게 되었다.




함께 내딛는 발걸음


그리스 비극처럼 결말을 알고 시작한다면 어떨까?
결말을 모르는 나와 아는 나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을까?

 물속으로 가라앉는 배와 동시에 바라보았던 친구들의 죽음, 촛불을 들고나갔던 거리, 우산을 펼쳐 최루탄을 막아냈던 우산 혁명까지. 연극을 통해 우리는 유사한 환경 속에 놓여있는 모두를 발견하게 된다. 홍콩의 우산 혁명 운동에서 불렀던 ‘해활천공(海阔天空)’과 한국의 촛불집회에서 불렀던 노래를 서로 배워 불렀다.


 특히 우산 혁명 당시의 영상과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배우들을 보며 우리 사회에서의 비슷한 경험과 과정으로부터 받았던 상처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또한 고통을 함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와 눈빛, 이야기를 듣고 작품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분노하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느꼈다.


 압축된 시간을 살아온 아시아의 각 도시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이 발생시키는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의 골은 깊었다. 이는 단순히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개인의 삶을 경유하고 있으며, 그들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혁신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과정을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함께했기 때문에 결말을 알고 시작하는 실패한 혁명이더라도, 그들은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함께 분노하고, 소리치며 나아갈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희망을 노래하다


 연극의 마지막 장면은 다음과 같았다.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는 스크린을 향해 물건을 던졌다. 이내 배우들이 모여 스크린이 하염없이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막을 내렸다. 마치 잔잔한 물에 돌을 던졌을 때 파문이 이는 것처럼 희망의 소리가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연극은 어찌 됐든 희망으로 끝날 것이다.”라고 말했던 한 배우의 대사처럼 우리의 삶도 희망으로 끝날까?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희망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를 통해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면서, 과거에 경험해 온 그리고 경험하고 있는 우리의 삶이 어쩌면 강하게 엮여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건이나 재난은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게 아니다. 끊임없이 현재의 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때로는 상처를 내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패배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마치 가라앉는 세월호를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18살의 내가 여전히 진행 중인 광화문에서의 세월호 서명이나, 추모 행사를 바라보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그 죄책감을 안고 친구의 얼굴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이 공연을 통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역사와 사회가 남긴 상처를 서로가 보듬어줄 수 있다는 것을. 희망이라는 끈으로 서로를 묶어서 지치지 않게 북돋으며 동행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지금 여기에서, 함께 희망을 노래하는 법을 배워 나가면 되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동시대를 이야기하는 연극, 그 순간만큼은 ‘지금’을 이야기하고 있는 연극이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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