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작품 한 편을 관람하는 과정을 떠올려보자. 대부분은 극장에서 마주할 무언가에 기대를 품은 채 발걸음을 옮긴다. 혹자는 현실과는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을 꿈꿀지도 모른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관객들은 기대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부푼 마음으로 극장의 문을 두드리곤 한다. 각자의 좌석에 앉아 연극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상기되어 있다. 서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에 모였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연극을 보러 간다는 것은 그날 단 한 번만 이루어지는, 또다시 상연한다고 한들 어제의 숨소리까지 완벽하게 재현할 수 없는 라이브 공연만의 특별한 흥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특별한 흥분을 기대하는 관객들의 들뜬 호흡이 모여 정체 모를 긴장감을 형성한다. 만일 극장에 모인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극장이 텅 비어 버린다면 연극은 존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관객의 수행과 역할이 중요한 장르이기도 하다.
연극의 관객은 영화의 관객, TV 프로그램의 방청객과는 다른 성질을 갖는다. 관객 참여의 정도는 관객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re)부터 조용히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바라보는 텍스트 중심의 연극까지 프로덕션마다 추구하는 양식에 따라 다르지만, 관객이 어떤 방식으로든 공연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연극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가 『시학』에서 비극을 정의하기 전부터 오늘날까지 약 2,500여 년 동안 다양한 모습으로 변천해왔다. 다시 말해 원시사회의 제의에서 출발한 연극에서 고대 그리스 비극을 거쳐 현대극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조에 의해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제의에 참여하는 군중의 한 사람으로, 무대 위에서 행해지는 행위에 대한 객관적인 관람자나 적극적인 참여자로, 또한 자신의 의견을 내세워 공연을 평가하고 발전시키는 비평가적 입장”[1] 등 관객은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해 왔다.
관객의 참여가 연극 공연의 핵심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관객 참여의 성격은 장소에 따라, 사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리고 같은 문화라고 해도 이벤트의 종류 혹은 공연 장소에 따라 다양하다. 가령 이탈리아 베로나의 로마 원형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는 경우, 위쪽 계단에 앉은 지역 주민들은 빵과 살라미와 와인을 나누어 먹으면서 피크닉을 즐긴다. 그러나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센트럴 파크에서 공연할 때는 관객들은 잔디밭에 앉아 피크닉을 즐기며 와인을 마신다. 같은 종류의 공연이라도 환경이 다르면 기대되는 관객 행동 역시 다르다.[2]
한편 서구의 전통을 따르는 연극에서 관객은 막이 내릴 때까지 정숙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연 도중에 박수를 치지 못한다. 그리고 객석 등이 꺼지고 조명이 무대를 비출 때까지 조용히, 주의력 깊은 상태를 유지한다. 이는 오늘날 서구 연극의 전반적인 관습이기는 하나, 항상 이와 같은 관습을 따랐던 건 아니었다. 따라서 관객의 참여와 태도를 연극사의 흐름에 따라 거칠게 나눠보고자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연극은 일종의 페스티벌 역할을 했다. 온종일 먹고 마시는 행위가 펼쳐지는 사교 활동의 장(場)이자 연극 행사의 일부였다. 반면 고대 로마는 종교적 행사의 성격을 띠었다. 다양한 오락거리를 선사했으며, 성스러운 동시에 세속적인 공연들은 관객들을 즐겁게 만드는 데 목적을 두었다. 전차 경주나 짐승과의 목숨을 건 사투가 그 예이다. 흥미로운 건 이를 지켜보던 관객들이 다른 곳에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 공연 도중 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중세에서 연극은 지역 공동체 행사였다. 14세기에 시작된 기독교 순환극은 성경 속 구약과 신약의 일화를 연극화하는 데 주력했다. 동시에 떠돌이 배우를 보기 위해 동네 광장으로 모였으며, 배우와 관객이 호흡을 주고받으며 공연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은 배우와 대중 사이의 상호작용은 16세기에 이르러 전문 배우 집단을 통해 활발히 이루어졌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의 관객들은 야유와 휘파람, 환호, 잡담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심지어 배우들에게 먹던 음식을 던지는 시끄러운 관객이었다. 많은 이들이 극장에 지붕이 없었던 이유를 음식과 음료, 목욕하지 않은 몸에서 나는 악취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고 믿고 있다.
17세기 후반에 이르자 많은 연극이 실내에서 이루어지면서 관객들의 행동이 다소 정적으로 바뀌었으나, 여전히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관습이 존재했다. 더불어 실내 극장의 공연은 엘리트 관객을 위한 사교 행사로 변모했다. 또한, 전기등이 발명되기 이전으로 촛불 조명을 사용했는데, 이는 무대뿐만 아니라 객석까지 환하게 비추었다. 말굽 모양의 객석 형태로 인해 정면, 위, 아래를 보면 누구든지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누가 공연을 보러 왔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에스코트해서 온 사람은 누구인지 손쉽게 관찰하며 사교계 소문을 풍성하게 만들곤 했다.
이후 유럽 희곡들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방백(Asides) 독백(Soliloquies), 모놀로그(Monologues) 등의 극적 장치를 통해 참여를 끌어냈다. 동시에 민주주의 혁명을 반영함에 따라 대중적인 오락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가 성행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 관객들은 공연을 관람하면서 민주주의적인 자유를 마음껏 표출했다.[3]
이처럼 긴 역사 동안 관객들은 저마다의 시대와 환경에 따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연극을 즐겼다. 이에 반해 오늘날 관객은 상대적으로 수동적인 관람을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건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사실주의(Realism)로 알려진 연극 양식이 나타난 19세기 후반부터 조용하고 수동적인 관객이 자리하게 되었다. 사실주의 연극에서 관객은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무대 위의 세계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받는다. 이때 배우들은 현실과 최대한 흡사하게 구현된 무대 공간 속에서, 관객들이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인물을 연기한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무대 위 세계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을 한다. 이러한 약속이 극적 환상을 유지하며 제4의 벽(Fourth wall), 즉 무대와 객석을 나누는 보이지 않는 가상의 벽이라는 관습을 만들어 낸다. 더욱이 극작가들이 사실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창작하게 되면서 사실주의가 서구 연극을 지배하게 되었다. 실제로 사실주의 양식의 연기, 연출, 그리고 디자인이 미친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흐름이 비슷한 흐름으로 반복되듯이, 이후 연극적 관습을 타파하기 위한 실험적인 시도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20세기 연극인들은 제4의 벽을 허물고 관객들을 다시 공연에 참여시키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관습을 만들어내려는 시도한 바 있다. 하지만 수동적인 부르주아 청중들과 사실주의 연극 관습에 대항하기 위한 형식으로 가장 먼저 청중들을 참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완곡한 형식들이 그 뒤를 따랐다. 능동적 관객이라는 생각은 결국 아방가르드의 영역을 떠나 확고하게 자리 잡은 관습이 되고 말았다.
예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 1933~1999)는 “연극이 사회변천에 따라 변모해 왔지만, 지각에 호소하고, 직접 살아있는 영교를 갖는 배우와 관객의 관계가 없이는 연극은 존재할 수 없다”[4]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만큼 관객의 존재는 연극에서 핵심적인 고정불변의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더불어 극작가 아서 밀러(Arthur Miller, 1915~2005)는 “불행히도 널리 알려진 사실은, 연극에는 화학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희곡, 공연, 관객의 성격이 한데 섞인 것으로, 이것이 없으면 폭발의 요소들이 차가운 채로 남게 된다.”라고 말했다. 즉, 연극은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복합적인 동시에 가변적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배우와 공연, 옆 좌석의 관객들이 새로운 관계를 맺고, 구축된 세계 속으로 함께 들어가는 특수한 장르이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진행될 수 없다.
어느 때보다 관객의 참여와 반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요즘, 필자는 어떤 이유로 배우와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이 연극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는지 궁금해졌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일련의 역사적 흐름을 공유하게 되었다. 아울러 연극사의 흐름에서 관객의 역할과 위치가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주목하고자 했다. 장르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시대에 어떤 관객으로 작품에 참여해야 할지, 창작자로서 관객을 어떻게 참여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관객과 작품, 그리고 창작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의 끈을 아로새긴 채 예술이라는 사건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1] 정대용, 「연극에서 의미생산으로서의 소통과 관객의 역할」, 순천향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8, 6쪽.
[2] 미라 펠너, 최재오 · 이강임 · 김기란 · 이인수 옮김, 『공연예술산책』, 시그마프레스, 2014, 26쪽.
[3] 미라 펠너, 최재오 · 이강임 · 김기란 · 이인수 옮김, 『공연예술산책』, 시그마프레스, 2014, 27-33쪽.
[4] 크리스토퍼 인네스, 김미혜 옮김, 『아방가르드 연극의 흐름』, 현대미학사, 1997, 237-2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