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헨리 조지

by 임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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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조지는 1839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난과 불평등의 문제를 목격하며 자랐다. 그는 14살 무렵 학업을 중단하고 선원으로 호주까지 다녀오는 등 파란만장한 청년기를 보냈다. 젊은 나이에 미국 서부로 이주해 인쇄소 조수, 기자, 편집자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의 빈민가를 보면서 극심한 빈부 격차에 큰 충격을 받았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는데 사람들의 삶은 왜 나아지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그를 경제학의 길로 이끌었다.


조지는 기술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높아지면 당연히 사회가 더 풍요로워지고 빈곤이 줄어들 것이라는 통념에 강력한 의문을 제기했다. 실제 그가 목격한 현실은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공장들이 들어서고, 교역이 전 세계로 확대됐지만 도시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업과 경기침체는 반복됐고, 자산을 소유한 소수 계층만이 더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는 물질적 진보가 가난을 완화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난을 심화시키고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고 봤다.


조지가 내린 결론은 토지에 있었다. 그는 맬서스가 주장한 인구론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인구가 늘어나더라도 기술 혁신과 생산성 증대를 통해 식량 공급이 충분히 늘어날 수 있다고 봤다. 대신 그는 인구 증가와 사회 발전이 토지의 가치를 끊임없이 끌어올리고, 토지 소유자들이 아무런 노력 없이 막대한 이득을 가져가는 구조에 주목했다. 생산성이 높아지고 사회가 부유해질수록 그 혜택은 노동자와 기업이 아닌 토지 소유자에게 집중됐다. 결국 진보의 열매는 불로소득의 형태로 귀결됐고, 노동자는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조지는 1879년 발표한 진보와 빈곤에서 부의 불평등은 토지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토지에 특별히 세금을 부과하는 ‘토지가치세’를 주장했다. 토지는 자연이 준 것으로 누구도 독점할 수 없고, 토지의 가치는 공동체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리카도의 지대론에서 영감을 받아 현실적 처방을 제시했다. 토지세만으로도 정부 재정을 충당할 수 있고, 다른 모든 세금을 폐지해도 된다고 봤다. 기업과 노동력에 세금을 부과하면 생산이 위축되지만 토지는 움직일 수 없기에 토지세만큼 공정하고 효율적인 세금은 없다는 논리였다.


조지는 토지세가 거의 시행되지 않는 이유를 지주 계급의 정치적 영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주들이 정부에 막강한 압력을 행사해 사회 개혁이 번번이 좌절된다는 것이다. 그는 토지가치세야말로 불평등을 해소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할 가장 확실한 수단이라고 역설했다. 토지세는 비생산적인 불로소득을 줄여 사회 전체의 생산성과 창의성을 높일 수 있다는 낙관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진보와 빈곤은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판됐다. 단순한 경제학 저술을 넘어 한때는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이라는 평가까지 따라붙을 정도였다. 미국뿐 아니라 영국, 유럽, 호주 등에서 큰 영향을 미쳤고 수많은 정치가들에게 영감을 줬다.


조지는 여러 선거에 직접 출마하며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자유무역을 지지했고, 토지세를 중심으로 한 조세개혁을 구체적 정책으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비록 선거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시민들에게 토지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끌어올리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토지세 도입은 쉽지 않았고, 그의 이론은 경제학계에서 주변부로 밀려났다.


조지는 생애 마지막까지 개혁의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는 사회 개혁을 위한 글을 쓰고, 강연을 다녔다. 1897년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이름은 지조지즘이라는 독자적 사조로 남았다. 부동산 가격 상승, 불평등의 심화라는 문제 앞에서 조지는 다시 소환된다. 토지가치세 논의는 유효하며, 토지 공공성과 불로소득 환수라는 화두는 시대를 넘어 이어지고 있다. 조지가 남긴 왜 진보가 빈곤을 동반하는가라는 물음은 현대사회에도 강력한 성찰을 요구한다. 그의 대답은 명확하다. 문제는 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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