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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수책방 Jan 25. 2021

팀장님, 저한테 왜 그러세요?(스승과 제자 편)

-이놈의 조직 문제 4. 

마 팀장과 설 대리가 기획회의를 시작했다. 설 대리의 기획안을 추진할지 말지, 추진하게 되면 어떻게 진행할지 결정하는 시간이었다. 설 대리가 왜 이런 기획을 했는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마 팀장은 살짝 미소를 띠며 말을 했다. 

“설 대리는 기획안이 뭐라고 생각해요?”

“네? 저는…. 이 기획을 통해 어떤 책이 만들어질지, 미리 가늠해 보는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기획안을 보면 뚜렷하게 상상이 돼요?”

“네, 저는 컨셉도 차별성이 있고 괜찮은 책이 나올 거 같습니다.”

“흠, 그럼 컨셉은 뭐라고 생각해요?”

“컨셉은 이 책의 핵심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거죠.”

“기획안에 핵심이 잘 드러난 거 같아요? 이 책의 컨셉을 말로 설명해 볼래요?”

“그러니까 여기 썼다시피 우리는 노동자이면서 왜 회사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지 탐구하는 책이죠.”

“탐구하고 끝?”

“아니, 그러니까…. 그런 탐구 과정을 통해 직장인이 회사 편을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도 모르게 회사 편에서 이야기하는 건 없는지, 또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직장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담은 책이죠.”

“말로는 그렇게 잘하면서, 기획안에는 컨셉이 잘 안 드러나는 거 아닐까요? 기획 의도는 뭐라고 생각해요? 기획 의도가 짧고 분명하게 들어간 거 같아요?”

“그러니까 기획 의도는….”

“거 봐. 잘 설명 못하잖아요. 기획 의도는 좀더 분명하게 의미가 전달되게 해야죠. 여기 보세요. 그리고 뭐뭐 같다 이런 말을 자주 쓰는데, 이러면 주장이 흐릿해 보여요. 여기 뭐뭐 한다면, 한다면 같은 표현도 너무 자주 쓰이고. 좀더 내용 전달이 잘되게 기획안 수정해서 내일 다시 할까요?”

설 대리는 수정 또 수정했다. 마 팀장이 틈틈이 설 대리 자리로 와서 기획안에 대한 가르침을 전달했다. 나중에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전에 자신이 했던 기획안 양식과 샘플까지 전달했다. 

다음 날 기획회의 시간. 설 대리의 기획안을 검토한 마 팀장은 또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요? 기획안 좋아진 거 같아요?”

“네, 어제보다 나은 거 같아요.”

“맞아요. 훨씬 내용 전달도 잘되고 이야기가 선명한 느낌이네요.”

“그럼, 어떻게 할까요? 기획 이대로 추진해도 될까요?”

“음, 근데 기획 자체가 좀 재미가 없어요. 이거 하지 말죠. 좀더 재밌는 기획 진행하면 좋을 거 같아요.”          



한번은 방치형 팀장을 만난 적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에게 무엇 하나 알려주는 일이 없었다. 내가 할 일 몇 개를 정해만 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처음 겪는 업계 용어, 처음 만나는 거래처 관계자들, 이것저것 당혹스러운 게 많았다. 뭔가 잘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묻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업계 선배들은 모르는 건 다 물어보고 하라지만 무언가를 물어보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도 많다. 방치형 팀장도 그랬다.


그런데 난 내가 겪었던 팀장 중 방치형 팀장이 가장 좋았다. 아니 나랑 잘 맞았다.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일하는 걸 좋아하는 나와 맞는 팀장이었다. 물론 누군가는 방치형 팀장과 너무 안 맞아서 일을 힘들어 하는 경우도 봤지만, 어쨌든 나의 경우는 힘들 게 없었다.


또 한번은 내가 모르는 거 하나하나 세세하게 알려주고 모르는 걸 물어보는 게 어렵지도 않은 친절형 팀장을 만났다. 그때도 처음 겪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팀장에게 묻고 쉽게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친절형 팀장은 나와 상극이었다. 친절함이 과도했다. 신입이든, 3년차든, 5년차든 상관없이 늘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었다. 나는 일을 배우고 싶은 게 아니라 일을 하고 싶은데, 언제든 가르침을 받아야 해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배운 방식대로 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일을 하면 지적받고 또 다른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다. 옆 팀원들은 이런 속도 모르고, “너무 좋은 팀장 만나서 좋겠어요. 너무 친절하시잖아요”라고 했다.



자존감을 떨어뜨리다


나는 자존감이 굉장히 높은 편이라 생각한다. 지금껏 일을 하면서 자존감이 떨어져 본 일이 없으니까. 하지만 친절형 팀장을 겪으면서 처음으로 자존감이 나락으로 떨어진 일이 있었다. 당시 처음 해보는 분야의 책을 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걸 검토한 팀장이 회의에서 이야기했다. “이렇게 쓰면 독자들이 이해할 거 같아? 박 대리는 이 분야 처음이지? 처음이라서 그래. 아직 잘 몰라서 그래.” 그러고는 내가 편집한 책을 구성부터 문장까지 싹 뜯어고쳤다. 그걸 보고선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게 잘못됐나, 내가 잘 모르고 있구나 생각하다 보니 자신감도 자존감도 함께 떨어졌다. 이 상태는 생각보다 오래 갔다. 경력이 쌓여도 여전히 내가 잘 모르는 사람처럼 팀장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팀원으로 나보다 더 경력이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그들도 회사에 있으면서 자존감이 떨어져 갔는데, 나중에 팀장과 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누구 씨는 경력은 많은데, 제대로 된 팀장한테 배우지 못해서 그래. 아직 모르는 게 많아. 여기서 제대로 배워야겠어.”, “누구 씨는 이 분야 경험도 있지만 최근에는 또 다른 분야 위주로 일을 해서 잘 모르는 게 많아. 좀더 배워야 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는 걸 듣고서는 모든 게 명쾌해지고 바로 자존감은 회복되었다.


선생님처럼 가르치는 걸 좋아하는 팀장은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기 때문에 늘 팀원보다 우위에 서야 했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경력이든, 경험이든, 나이든, 학력이든, 내가 팀원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고 팀원은 그러니 나에게 배워야 한다. 이 명제만 통하면 됐다. 이런 팀장에게 휘둘리면 팀원은 ‘난 왜 실력이 안 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라는 생각에 빠져 자존감이 낮아지기 십상이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아, 여기 회사지?



자존감이 회복되고 보니 팀장이 처음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던 일도 분명히 보였다. 나는 내 방식대로, 팀장은 팀장 방식대로 일하고 있을 뿐이었다. 팀장은 내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지적하고, 나는 팀장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해할 수 없던 거다. 그런데 팀장은 자신의 방식이 무조건 옳고 컨펌이란 권한으로 팀원을 가르치려만 들었다. 그래야 팀원의 역량을 키울 수 있고, 그게 팀장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결국 팀장은 팀원이 자신의 방식에 맞춰 일하기 시작하면 실력이 늘었다며 만족한다. 그 이후로 팀장이 수정한 내용은 유치하고 재미가 없었다. 


하지만 친절형 팀장 밑에서 여러 해를 일하고, 팀장으로부터 “이제 일이 많이 늘었네”라는 말도 들었지만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여전히 팀장은 내가 하는 일을 빽빽히 수정하려 들었고, 틈만 나면 질문을 던지며 자기 가르침을 내가 잘 받고 있는지 확인하려 들었다. 그러면서 왜 일이 이렇게 더디냐며 핀잔하기 일쑤였다. 


팀장들이 제발 깨달았으면 하는 바가 있다. 가르치려는 눈으로 보면, 가르칠 것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선생이 되어버리면, 상대방은 학생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나도 전문가이지만, 상대방도 전문가라고 인식한다면, 겸허히 함께 일할 수 있지 않을까(회사에서는 직장인에게 그토록 프로 의식을 가지라고 하는데, 왜 프로로 대접하지 않는가). 우리는 회사에 일을 하러 온 거지, 일을 배우러 온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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