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전쟁사 1. 전쟁의 파도 - 임용한(혜안) ●●●●●●●●●○
고구려군이 흥해 점령을 목전에 두었을 때,
백제의 구원병에 가야군까지 합세한 대병력이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이 시대의 국가는 분권적 성격이 강했다. 아직 귀족들이 자신의 땅과 백성을 직접 지배하고 있었다. 때문에 군대를 동원하려면 귀족의 협력을 얻어야 했다. 새 땅을 점령해도 대개 그곳은 누군가의 영지 같은 곳이 된다. 국가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그 내부에는 사적인 지배구조와 질서가 엄연히 살아 있다.
그러면 만주에 영지를 두고 사는 귀족에게 남부지방을 정복하자고 하면 그가 선뜻 응할까? 그렇게 먼 곳에 영지를 두면 별 이득이 없다. 수-당과 같은 강대국에서 쳐들어온다면 지배층이 총체적인 위기를 느낄 테니까 거국적으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다. 그러나 타 지역을 정복하는 일은 다르다. 혹 로마 제국 같이 제국 내부에 거대한 상권이 형성되었다면 장거리 원정에서도 이익을 얻겠지만, 당시의 우리 사회는 농업과 반유목 사회가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거나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 대해서는 큰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 p. 280. 평양 천도와 북위와의 전쟁
. 임용한 박사의 한국고대전쟁사 1권은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에서부터 시작해 고구려와 부여, 백제와 말갈, 신라와 왜에 이르기까지 동북아시아에 자리잡기 시작한 집단들이 생존을 위해 투쟁하면서 국가의 틀을 잡아 외부로 팽창하는 과정을 세세하게 따라간다. 이 시기에 남겨진 기록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일본서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할 뿐인데도 이 책은 마치 그 시대를 직접 보면서 쓰여진 것처럼 상세하고 현장감이 있다.
고구려군은 신라의 수비군이 북상하여 고갯길에서 저지선을 치기 전에, 그리고 백제의 구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흥해를 점령하고 경주를 짓밟아야 했다. 삼척 근처에서 출발한 고구려군은 강행군을 하여 10일 내지 길어야 15일 만에 울진에서 흥해 사이의 어느 지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여기서 믿기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고구려군이 흥해 점령을 목전에 두었을 때, 백제의 구원병에 가야군까지 합세한 대병력이 그들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들이 길을 나누어 맡아 고구려군의 진격을 막았다고 한다. 고구려군은 흥해를 통과하여 평야길로 나서기 직전에 저지되었던 모양이다.
- p. 319. 숙명적 만남
. 앞서 읽었던 3권에서도 그랬듯,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임용한 박사의 지리를 읽어내는 눈과, 과거의 이들이 지금의 우리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분리해버리지 않는 통찰이다. 사서의 내용과 지형에 대한 분석이 합쳐질 때 단편적이었던 기록은 방대하고 세세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전쟁의 한 장면으로 탈바꿈한다.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했다'는 단편적인 기록이 한반도의 지형 정보와 결합될 때 '어디에서 어디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가 부여되는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다. 정복을 시도하려면 훌륭한 도로가 필수다. 그래야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고, 빠르게 효과적으로 정복지를 확대할 수 있다. 한성이 보유한 최고의 도로는 남한강 수로다. 경기, 충북 지역으로 단숨에 내려가며, 풍족한 이천, 여주평야와 충주평야를 확보할 수 있다. 대신에 세상은 공평해서 훌륭한 도로는 적의 침공도 수월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한성은 한강 수로의 상류가 아닌 하류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 문제가 더 심각하다. 그러므로 한성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남한강 수로의 시발점을 장악하는 것이 필수다. 자고로 공격에 집중하려면 먼저 수비가 안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적은 비용과 노력으로 정복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정복 이전에 한성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서도 백제는 먼저 남한강 상류 즉 충북 지역을 확보해야 했다.
- p. 123. 서쪽의 해, 동쪽의 달
. 이 책 말미에 실린 성왕과 신라와의 싸움은 그런 임용한 박사의 분석이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나제동맹을 통해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 하류를 수복한 백제였지만, 신라와의 경계가 되는 소백산맥이 백제의 턱 밑까지 밀고 들어온 형태로 자리잡은데다 그 한복판인 보은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인 삼년산성이 신라의 수중에 있는 이상 백제는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도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소백산맥을 서쪽으로 넘으면 제대로 된 자연적 방어선이 없는 넓은 평야가 웅진과 사비까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백산맥을 따라 병력을 집중시켰다가 신라가 남한강을 따라 한성으로 빠르게 진공하면 육군으로는 도저히 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 결국 고구려가 북쪽으로 물러나고 백제가 양쪽을 방어할 수 없어 한성에서 물러나자 신라는 비어버린 한성과 한강 하류를 차지한다. 하지만 백제에게도 한 방이 남아 있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신라가 한강 하류와 소백산맥에 병력을 양분한 틈을 타 소백산맥 방어선 방면으로 힘을 끌어모아 보은 코앞의 옥천으로 진격한다. 그게 관산성 전투다.
신라가 단독으로 한성을 공격한다고 해도 백제는 막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일단 백제는 상당한 병력을 사비와 웅진의 방어에 묶어 두어야 한다. 거꾸로 신라를 위협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신라를 위협하려면 고구려도 넘지 못한 소백산맥의 요새지대를 돌파해야 한다. 한성과 사비로 전선이 양분되니 당연히 한성 지역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해진다. 그뿐 아니다. 신라는 남한강 상류를 장악하고 있다. 남한강은 우리 나라의 강 중에서도 최고의 수량과 풍부한 운송 능력을 자랑한다. 양측의 병력이 같더라도 한 쪽의 기동력이 두 배라면 실제 전력은 두 배 이상의 우위를 점하게 된다. 결국 백제는 한성과 사비 방어에 병력을 나누고, 한성에도 신라보다 많은 병력과 물자를 고정적으로 배치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버렸다. 여기에 귀족세력의 지원은 충분치 않고 고구려까지 공격에 합세한다면?
- p. 343. 막다른 선택
. 이런 식으로 그들이 했던 행동의 당위성을 이해하게 되면 과거의 이들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행동을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엔 '어리석게') 벌이는 게 아니라, 우리와 같이 상황을 파악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된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거쳤을 때 한 줄의 기록은 인물과 배경과 전개를 갖춘 하나의 이야기로 변모한다. 이렇듯 임용한 박사가 과거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결같다. '그게 어떤 시대든 간에, 사람들은 납득할 수 있는 이유와 원칙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 그런 시각에서 쓰여졌기에 이 책은 쉽고 즐겁게 읽힐 수밖에 없다. 낯설고 종잡을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라도 그렇게 했을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되므로.
신라가 힘들게 생존을 유지하는 동안 백제는 "그 무엇인가"를 깨닫고 실행에 옮겼다. 그 무엇인가는 사회의 새로운 틀이었다. 조직이 커지면 조직의 운영원리를 바꾸어야 하고, 더 큰 것을 얻으려면 먼저 자기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것 중에서도 버리기 힘든 것이 기존의 관행, 기득권, 파벌, 족벌이다. 지배층이 극히 협소했던 이 시기에 파벌, 족벌을 버리라는 말이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에는 도토리 키재기 같아도 당시의 기준에서 보면 천지개벽에 해당하는 수준일 수도 있고 거기에서 승부가 갈리기도 한다.
- p. 162. 전쟁 영웅의 비극
국사 교과서에서 고대국가의 4요소로 왕위세습제, 관료제, 율령제, 불교 공인을 거론한다. 이 제도의 의미를 하나하나 설명하기는 곤란하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전체 부족이 공동의 룰과 기준을 갖추고, 국가의 이익이 부족의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미다. 동시에 이 체제는 한두 부족이 전체를 지배하는 시대에 비해 적어도 부족장, 씨족장, 촌락의 지배층들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공정하고 넓은 기회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야 정복전쟁은 약속의 땅을 위한 행군이 되었다. 넓은 땅과 기회가 그들 앞에 놓여 있다. 이것이 고구려의 팽창을 이끌어 낸 진정한 에너지였다.
- p. 208. 폴리스를 넘어서
일반적으로 사람은 나이가 들거나 큰 좌절을 겪으면 소극적이 된다고 하지만, 다른 모든 진리처럼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이 실패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면 사람은 조급해지고 무엇인가 일을 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이나 동물이나 궁지에 몰리면 극도로 소극적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과감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만 생각하거나 반대로 비관하게 되는 것이다.
- p. 352. 막다른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