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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는 '동물농장'을 쓸 수밖에 없었는가

카탈로니아 찬가 - 조지 오웰(민음사) ●●●●●●◐○○○

by 눈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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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5월 3일 한낮에 한 친구가 호텔 라운지를 걷다가 무심코 말했다. "전화 교환국에서 문제가 좀 생겼다고 하던데." 어찌 된 일인지 그때 나는 그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날 오후 3, 4시쯤, 나는 람블라스 거리 한복판을 걷다가 등 뒤로 소총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젊은이들이 몇 명 보였다. 손에는 소총을 들고 목에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검붉은 손수건을 묶었다. 람블라스에서 북쪽으로 빠지는 샛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높은 팔각탑에 있는 누군가와 교전 중인 것이 분명했다. 샛길을 내려보는 그 탑은 교회였던 것 같다. "시작됐구나!" 그 즉시 나는 직감했다. 그렇다고 크게 놀란 것은 아니다. 지난 며칠 간 모든 사람이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 p. 159.




. 1936년 겨울부터 그 다음 해 7월에 이르기까지, 조지 오웰은 스페인에 있었다. 36년 여름 우파 성향의 국민전선이 이끄는 반란군이 좌파 성향의 인민전선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켰고, 초기 양 측의 전복시도와 진압 시도가 모두 실패하면서 쿠데타는 내전으로 확장되었다. 이에 전 세계의 좌파와 공화주의자들이 인민전선을 지지하며 스페인으로 몰려들었고, 그 속에 결혼 6개월차였던 조지 오웰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 당시 스페인의 제대로 된 유일한 정규군은 국민전선에 속해 있었기에 인민전선 측은 무기도 물자도 부족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전쟁터에 뛰어든 조지 오웰에겐 그런 것은 얼마든지 견뎌낼만한 것이었다. 실제로 책의 초중반부 내내 오웰은 부족한 물자, 악취, 추위, 하나마나한 훈련과 한심스럽고 지지부진한 전선 상황을 빼곡하게 적어가지만, 그렇다고 딱히 그런 상황에 분개하거나 좌절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어중이떠중이 의용군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 그래서인지 책을 읽다보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보다는, 하루키의 '먼 북소리'가 먼저 떠오른다. 가끔 오가는 간헐적인 총성을 제외하면(그리고 그 총성은 대부분 상대에게 가닿지도 않는 것이었다) 소소하고 유머러스하게 쓰여진 길 위의 고생담으로 읽히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비록 전쟁터이긴 했지만 그가 있던 전선에서는 반 년 가까이 몇몇 어설픈 시도를 제외하면 거의 전투라 할 만한 것이 이뤄지지 않았고, 실제 책을 꼼꼼히 읽어봐도 조지 오웰이 사살한 적병은 딱히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아군끼리 오인 사격하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팔에 하얀 완장을 차기로 했다. 그때 연락병이 도착하여 하얀 완장이 없다고 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누군가 푸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파시스트들한테 하얀 완장을 차게 하면 안될까요?"

- p. 117.




. 하지만 책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이렇게 목가적이고 소박했던(?) 전선의 이야기는 급격하게 무겁고 다급한 생존의 이야기로 바뀌어간다. 하지만 그건 적의 공격이 거세졌기 때문이 아니다. 1937년, 인민전선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총리인 카바예로를 밀어내고 정권을 장악하고자 했던 네그린과 손을 잡고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오웰이 지지하고 있던 통일노동자당을 숙청했기 때문이다. 그 해 5월 바르셀로나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국민전선과의 내전으로 약해진 인민전선 정부를 상대로 '내전 속의 내전'을 벌여 카바예로를 몰아내고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데 성공한다.


. 그리고 주도권을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에서처럼 스페인에서도 가혹한 숙청이 벌어진다. 오웰과 함께 싸우던 많은 이들이 전선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체포된 채 투옥되고 처형되었다. 오웰 역시도 계속 전선에 있었다면 꼼짝없이 잡혀갔겠지만, 때마침 전선에서 큰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다가 거동이 가능해졌던 딱 그 즈음에 숙청이 시작된 덕분에 극적으로 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중간에 의사가 오웰에게 운이 좋아서 총에는 맞았지만 치명상은 피했던 거라고 이야기하고, 오웰은 운이 좋았으면 총에 맞지 않았을거라고 받아치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는 '이렇게 절묘한 시기에' 총에 맞았던 거야말로 정말 운이 좋은 일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사태를 파악한 오웰이 아내와 함께 간발의 차로 추적을 따돌리고 전역증과 여권을 받아 영국으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내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범죄자 검거가 아니다. 단지 공포 정치일 뿐이다. 당신은 어떤 특정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주의>라는 죄를 지었다. 당신이 통일노동자당 의용군에 복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옥에 갈만한 죄가 된다. 법을 지키기만 하면 안전할 거라는 영국식 사고 방식에 매달려봤다 소용없다. 법은 경찰이 마음먹는 대로 만들어졌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몸을 숨기고 통일노동자당과 관계되는 사실을 감추는 것이다.

- p. 270.




. 그래서 쿠데타와 숙청을 다루는 이 책의 뒷부분은 여러모로 읽기가 쉽지 않다. 적에 대항하는 용기있고 순수한 자원병들의 훈훈한 고생담은 내분과 암투의 이야기로 바뀌었고, 이 사건에 대해 조지 오웰이 이야기하는 '통일노동자당'이니 '뉴스 크로니클'이나 '핏케언'이니 하는 사설은 우리에겐 너무 낯선 이야기이기에. 오웰 스스로도 이 부분이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책이 외면받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실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컸던 당시 영국에선 프랑코가 아닌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를 비판한 이 책은 출간조차 쉽지 않았다고 한다(조지 오웰의 책인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찾아갔던 스페인에서 한순간에 배신당해 생명을 위협당해 간신히 탈출할 수밖에 없었고, 그와 함께 싸우던 이들이 소리소문없이 옥중에서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그는 도저히 침묵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쓰디쓴 경험은, 조지 오웰로 하여금 주변의 모두와 등을 돌리면서도 공산주의를 단호히 배격하는 '동물농장'의 길을 걷게 만든다.





이어 다시 영국으로 왔다. 영국 남부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산뜻한 풍경을 지닌 고장일 것이다. 그쪽을 지날 때, 특히 임항 열차의 편안한 쿠션 위에 앉아 평화롭게 배멀미로부터 회복되고 있을 때는,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일본의 지진? 중국의 기근? 멕시코의 혁명? 걱정 말라. 내일 아침이면 현관에 우유가 놓여 있을 것이고, 금요일에는 '뉴 스테이츠먼'이 나올 것이다. 산업 도시는 멀었다. 연기와 궁핍의 얼룩은 지구 표면의 완만한 곡선에 감추어져 있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 알던 영국 그대로였다. 철로 때문에 파헤친 곳은 야생화로 덮여 있다. 외진 풀밭에서는 윤택한 빛을 발하는 준마들이 풀을 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흐르는 냇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우겨져 있다. 느릅나무의 녹색 가슴, 오두막 정원의 참제비고깔. 이윽고 런던 외곽의 드넓고 평화로운 광야, 진창 같은 강물 위의 짐배, 낯익은 거리, 크리켓 시합과 왕족의 결혼을 알리는 포스터, 크리켓 투수 모자를 쓴 남자들, 트라팔가 광장의 비둘기, 빨간 버스, 파란 제복의 경찰관.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때때로 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화들짝 놀라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 p.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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