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 폴 오스터(열린책들) ●●●●●●○○○○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평생 대화를 나눠왔으며,
앞으로도, 숨이 멎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레즈니코프는 60대 후반이 되어서야 조금씩 인정받기 시작했다. 뉴 디렉션스 출판사에서 그의 시 선집 '맨해튼 물가에서'를 냈고, 몇 년 후 '증언' 첫 권을 선보였다. 두 책이 성공을 거뒀지만 - 그를 찾는 독자도 늘어갔지만 - 뉴 디렉션스는 작가 명단에서 레즈니코프를 빼기로 했다. 세월이 흘렀다. (중략)
레즈니코프는 무명작가의 삶을 살았을지언정 작품에 분노의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분노하기에는 너무도 긍지가 높았고,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 신경쓰기엔 창작하기에 바빴다. 사람들은 조용히 말하는 이에겐 늦게 귀 기울인다. 하지만 레즈니코프는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말을 듣게 될 것임을 알았다.
찬미의 노래
나 승리 때문에
노래하진 않네.
가진 거라곤
흔한 햇살
산들바람
봄의 아낌없는 선물 뿐.
- p. 147. 레즈니코프 X 2.
. 폴 오스터가 아직 소설가로 데뷔하기 훨씬 이전이었던 1967년부터 그가 마지막 두 편의 소설을 내기 전인 2020년까지 그가 썼던 에세이와 리뷰들을 한데 모은 책. 하루키의 책 중에 '잡문집'이라는 게 있는데(정작 내용은 전혀 잡문스럽지 않다), 그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 책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루키의 잡문집이 이런저런 주제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데 비해 이 책은 주로 책 리뷰와 작가들의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는 점에서 방향성은 확실하다는 차이는 있지만. 그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나다니엘 호손, 사무엘 베케트, 살만 루슈디 같은 작가들도 있는 반면, 조 브레이너드나 레즈니코프처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작가들도 있다. 반백년을 문학에 몰입해서 살아온 폴 오스터의 인생을 볼 수 있는 글이다.
나는 기억한다.... 이젠 너무도 당연하고 자명하며 기본적인 글쓰기 비법이라, 글이 발명된 순간부터 알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고색창연하기까지 하다. 나는 기억한다라고 쓴 다음 잠시 기다리면 마음이 열리고 기억이란 걸 하게 된다.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고 구체적인 기억. 대상이 아이건 대학생이건 노인이건, 글쓰기를 가르치는 곳에서는 어디서든 사용되는 이 비법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과거의 경험을 되살리는 데 실패하는 법이 없다.
- p. 385. 조 브레이너드.
. 그러고보면 47년생인 폴 오스터가 2024년에 타계했으니 일흔 여덟을 산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뉴욕 3부작'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한 것은 인생의 절반을 넘긴 40대의 일이었고, 열린책들 출판사를 통해 그의 작품이 지금의 판형으로 소개된 게(내가 처음 뉴욕 3부작을 읽었을 땐 아직 소프트커버이긴 했다^^;) 00년의 초중반의 일이니 그 당시 그의 나이가 50대 중반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은 항상 뜨거운 열정과 젊은 감각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인물들은 그게 언제 나온 작품이건 간에 항상 젊고, 혼란스러워하며, 좌절이든 희망이든 순도 100%의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나는 언제나 폴 오스터는 내가 읽는 어떤 작가보다도(장르문학이나 몇몇 여류작가는 제외해야겠지만) 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그의 마지막 책들이 70대에 나왔다는 걸 알아봤자,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내가 그의 책 중에서 마지막에 읽은(그 역시도 60대 후반에 쓴 글이다) '선셋파크' 역시 그의 다른 글만큼이나 젊디젊은 글이었기에.
그리고 물론 사무엘 베케트, 그와는 1970년대 초반에 조앤 미첼을 통해 만나게 되었다. 내 젊은 시절의 문학적 영웅이 당시 지금 내 나이와 정확히 같은 예순일곱 살이었다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 p. 404. 예술 인생.
. 책을 읽어가는 기간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연스럽게(대부분의 작가들은 젊은 독자들보단 나이가 많으니까) 좋아하던 작가들의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치게 된다. 움베르트 에코, 에릭 홉스봄, (좀 다르지만) 안자이 미즈마루 등등. 그 전엔 미우라 아야코가 있었지. 그리고, 폴 오스터 역시 그 목록에 올랐다. 예전 처음 이 책을 읽을 때의 독자로서의 욕심처럼,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젊고 순도 높은 두 권의 책을 선물로 남겨주고.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통해 대화를 나누고 싶다던 그의 말처럼, 마지막까지 대화를 나누고, 낯선 이에게 말을 걸어주며, 그렇게 그는 떠났다. 부디 평안하시길. 나 역시도 그가 생각하고 말했던 것처럼, 소설의 현재와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고, 마지막까지 소설을 읽으며 그렇게 살아갈테니까.
저는 소설의 현 상태, 그리고 미래를 낙관적으로 봅니다. 책에 관련해서는 숫자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늘, 언제나 독자는 오직 한 명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소설은 특별한 힘을 지니며, 제 견해로는, 그래서 소설이라는 형식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소설은 작가와 독자가 동등하게 기여한 협업의 결과물이며, 낯선 두 사람이 지극히 친밀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영원히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할 사람들과 평생 대화를 나눠 왔으며, 앞으로도, 숨이 멎는 날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입니다.
2006년 10월.
- p. 450.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