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전쟁 - 제러미 보엔(플래닛미디어) ●●●●●●●◐○○
'어마어마한 거짓말'은 이제 진실로 받아들여졌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신문이나 라디오를 한 번이라도 접한 거의 모든 아랍인들은 영국과 미국이 개입했다고 믿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외무부 고위 관료들도 공식적인 반박문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의 외교관들에 따르면 그들은 "믿는다"고 말했을 뿐 실제로 믿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영국과 미국은 2주 후 자국 항공모함 항로를 공개했다. 그제야 비로소 소동은 다소 가라앉았다. 후세인은 미국과 영국 전투기가 이스라엘 편에서 싸웠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여전히 나세르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세르는 1968년 3월이 되어서야 자신의 거짓말을 인정했지만 나이 든 세대 중에는 아직도 영미 개입설을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 p. 336. 제3일, 1967년 6월 7일.
. 모든 전쟁, 아니 모든 역사가 다 그렇겠지만, 지금으로부터 반 세기 전에 벌어진 6일 전쟁은 전쟁의 시작에서부터 전개, 종전, 그 이후의 일들에 이르기까지 온통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전쟁을 유도했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강경 일변도였던 나세르는 정작 전쟁에 대비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고, 그전까지 나세르를 아랍 세계의 영웅으로 만들어주었던 정치 선전은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요르단과 시리아, 소련 등 나세르의 신화를 믿었던 국가들은 그로 인해 지금까지도 돌이키지 못하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아이러니는 비단 패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승리를 거둔 이스라엘은 승리에 취해 자신들이 도저히 진화할 수 없는 화약고를 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그 화약고는 지금도 끊임없이 불타면서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있다.
. 생각해보면 6일 전쟁이 일어나기 11년 전에 벌어진 2차 중동전쟁, '수에즈 전쟁'에서부터 이미 6일 전쟁의 씨앗은 자라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수에즈 운하의 통행수익을 노리고 운하를 전격적으로 국유화한 나세르에 대해 그전까지 운하를 운영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가 반발했고, 여기에 남부 아카바 만을 통행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했던 이스라엘이 개입하면서 벌어졌던 수에즈 전쟁. 군사적으로는 이집트 군이 이스라엘 군에 참패를 거듭한 끝에 5일만에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왔고 영국과 프랑스는 수에즈 운하를 점령했지만, UN과 미-소 양국의 강력한 압박으로 이스라엘이 아카바 만 통행권을 보장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승리한 3국 모두 점령지를 반환한 채 이집트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음에도 이집트는 중동의 맹주가 되었고, 나세르는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을 상대로 승리를 이끈 추앙받는 영웅으로 절대권력을 공고히 했다.
5월 22일 월요일 나세르는 판돈을 더욱 높였다. 그가 시나이 지역에 군을 동원했을 때 이스라엘은 맞받아치지 않았다. 나세르는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아카바 만으로 이어지는 티란 해협에서 이스라엘 배의 통행을 금지시킴으로써 1956년에 해제된 에일라트 항 봉쇄를 사실상 재개했다. 나세르는 이를 발표하기 위해 시나이 사막의 한 공군기지를 찾았다.
"앞으로 이스라엘 국기를 단 배는 아카바 만을 지날 수 없습니다. 아카바 만 출입로에 대한 우리의 주권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위협하길 원한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덤벼라'라고 말하겠습니다."
- p. 84. 전쟁의 먹구름.
. 그렇게 11년이 지난 시점에서, 나세르는 다시 한 번 모험을 시도한다. 예멘 내전에 뛰어들었다가 수렁에 빠진 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지위를 공고하게 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상대로 아카바 만을 봉쇄하는 초강수를 둔다. 그러나 정작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 이집트 군의 상당수는 예멘에 묶여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수에즈 전쟁에서 이집트가 보여줬던 추태를 떠올려본다면 설령 소련의 군사적 지원으로 군비를 증강했다 한들 이집트 군이 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이스라엘 군을 상대로 승리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 하지만 '지고도 이긴' 2차 수에즈 전쟁의 결과는 나세르로 하여금 스스로의 외교적 역량을 과대평가하게끔 만들었다. 고립된 이스라엘을 압박해서 불리한 협상을 강제하거나, 설령 이스라엘이 압박을 참지 못해 발작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더라도 처음 며칠만 버텨내면 주변 중동국가들이 참전해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뒤이어 강대국들이 개입해 선제공격을 한 이스라엘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은 2차 수에즈 전쟁 때와 같은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예멘의 수렁은 잊혀질 것이며, 다시 한 번 온 이집트와 온 아랍의 영웅이 될 수 있으리라.
전쟁을 하느냐, 아니면 나세르가 이스라엘에 최대의 정치적 수모를 안기도록 놔두느냐가 문제였다. 에일라트를 잃어 홍해와 아프리카, 그리고 이란산 원유를 얻지 못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존재가 위협받는 건 아니었다. 분명 심각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겠지만 이스라엘은 아랍에게 확실한 정치적 승리를 안겨주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고 보았다. 정치적 승리를 얻고자 나세르는 모든 것을 걸었다.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군사적 위기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면 시오니즘에 타격을 입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전쟁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또한 그는 전쟁이 일어난다 해도 강대국이 개입할 때까지 이집트 군대가 IDF를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으리라 보았다.
- p. 427. 제6일, 1967년 6월 10일.
. 그러나 나세르는 자신이 그린 큰그림에 취해 정작 이스라엘이 어떻게 움직일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의 전력과 상황을 분석해 전략을 수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전략에 상대의 전력과 상황을 끼워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스라엘이 나세르의 전략에 맞춰서 움직여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스라엘 역시도 2차 수에즈 전쟁에서 '이기고도 진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세르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방향의 발상을 한다. 강대국이 개입해 성과를 무효화하려 들 게 뻔하다면, 아예 개입하기 전에 성과를 확정지어 버리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강하고, 더 신속하고, 더 많이 준비된 일사불란한 작전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승부가 결정나 있어야 한다.
. 그래서 6일 전쟁은 짧은만큼 농축된 전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단 6일의 시간을 한 시간, 때로는 10분, 5분 단위까지 쪼개어 전황을 전개해야 한다. 그런 6일 전쟁이었기에 이를 다룬 제러미 보엔의 서술 역시 전쟁 전후를 느린 호흡으로 분석하기보다는 전쟁의 6일간을 숨가쁘게 따라가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실시간으로 바뀌는 전황과, 쏟아지는 정보들과, 그 사이에서 이뤄진 급박한 판단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실제로 그 6일 동안 수많은 정보가 홍수가 되어 당사자들과 관찰자들에게 밀어닥쳤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물론 요르단, 시리아, 그리고 소련과 미국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전쟁의 향배를 좌우하고 관련국들의 운명을 가를 판단을 내려야 했다. 거기다 단순히 정보가 많다는 것만 문제되는 게 아니었다. 그 정보들 속에는 수많은 선동과 거짓정보들이 끼어 있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이집트가 전쟁 기간 내내 펼쳤던 거짓선전은 그들 스스로의 목을 조르고 동맹이었던 요르단과 시리아까지 몰락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 앞서 말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분 단위로 진행되는 완벽한 준비를 통해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이집트를 패배의 늪으로 몰아넣었다. 이스라엘의 전투기는 이집트의 공군을 궤멸시켰고 전투기 한 대도 제대로 띄울 수 없는 상태의 사막전에서 이집트 육군은 패배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 관영 매체인 '카이로 라디오'가 이집트가 승리하고 있다는 거짓 선전을 거듭했고 공군 총책임자인 아메르도, 나세르까지도 이집트의 승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집트의 거짓 방송에 이집트 국민은 물론, 요르단도, 시리아도, 심지어 소련과 전세계도 모두 속아넘어갔다. 속지 않는 건 - 결코 속을 수 없었던 건 실제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는 이스라엘 뿐이었지만,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거짓 선전에 대해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거짓을 모두가 믿길 원했다. 이스라엘의 영리하고도 무서운 노림수였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 이상으로 소련에 양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소련이 저지른 실수로 이스라엘은 바라던 것을 얻게 되었다. 이집트 공군을 무력화시킨 이스라엘은 아군이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유엔에서 전쟁을 중단하라는 소리가 나올까봐 불안했다. 그럴 경우 1956년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점령한 시나이 영토를 모두 돌려주어야 했다. 하지만 소련이 이번에 저지른 실수로 이스라엘은 적의 가장 효과적인 외교적 무기를 사실상 무력화시켰다. 전쟁 이튿날인 화요일이 마무리될 무렵, 이스라엘은 시나이의 4분의 1을 장악했다. 몇 시간 후면 동예루살렘도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만약 소련이 6월 4일 이전 상태로 영토를 복귀시키고 병력을 철수시키자는 미국의 제안에 동의했더라면, 이집트는 시나이에서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지켜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신 아카바 해협을 포기해야 했겠지만 완패에 따라 지불해야 하는 대가로서 그리 비싼 것은 아니었다.
- p. 293. 제2일, 1967년 6월 6일.
. 이집트 군의 주력이 와해되고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를 석권한 그 시점에, 이집트의 거짓 선전으로 이집트가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시리아와 요르단은 패배할 게 뻔한 전쟁에 참전했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압박해 전쟁을 원점으로 돌려야 했던 - 그럴 수 있었던 - 소련까지도 이집트가 승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착각해서 미국이 전쟁 초 제의한 전쟁 이전의 영토로 돌아가자는 종전 제안을 거부하는 대실책을 저질렀다. 단 며칠의 오판이었지만, 그 며칠은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요르단 군을 모두 격파하고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과 예루살렘 동편을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 전역을 모두 점령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련이 뒤늦게 전황을 파악하고 개입하려 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주변 3국의 군대는 물론 이라크의 원군까지 궤멸시키고 골란 고원을 넘어 다마스커스를 포의 사정거리에 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제는 누구도 이스라엘에게 종전을 위해 점령지를 돌려줘야 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전략에 있어서도, 전술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의 완벽한 승리였다.
1967년 전쟁은 이스라엘을 점령자로 만들어놓았다. 그렇기에 이 전쟁은 오늘날까지 의미를 잃지 않고 있다. 하룻밤 만에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와 가자에 사는 10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인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경험은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모두에게 비극이나 다름없었다. 2003년, 이스라엘은 여전히 이곳을 식민지로 삼고 있다. 그 사이 팔레스타인 인구는 3배로 불어났다. 아바 에반은 팔레스타인 인들이 '깃발과 명예, 자존심과 독립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인을 종속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점령은 목숨을 싸구려로 만들고 점령을 강요하는 자와 저항하는 자 모두를 잔인한 인간으로 변모시키는 폭력의 문화를 생산했다. 인권과 자치는 팔레스타인 인에게 먼 나라의 얘기가 되었다. 갈 곳 없는 이들은 갈수록 극단주의 세력에 몸을 맡겼다.
- p. 440. 전쟁의 파장.
. 하지만 전쟁에서 완벽한 승리를 얻은 이스라엘 역시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전쟁의 결과 건국 이후 이스라엘의 숙원이었던 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의 넓은 영토가 요르단에서 이스라엘의 손으로 넘어왔지만, 이는 반대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끝나지 않는 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다. 종전 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 영토에 대해 역사적으로도, 전쟁의 승자로서도 자신들에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결코 포기하려 들지 않고 있다. 예루살렘 주변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정착촌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인들의 생활권을 끈질기게 줄여나가고 있다. 이런 이스라엘에 맞서 팔레스타인 거주민들은 더 이상 요르단이나 다른 국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테러를 통해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다. 6일 전쟁은 이스라엘에게 영광스러운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그와 함께 60년 넘게 계속되는 테러, 매파와 비둘기파 간의 내부 갈등, 점령으로 인한 국제사회의 비난을 함께 떠안게 만든 것이다.
. 일전에 읽은 임용한의 '중동전쟁'이 중동전쟁 전반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면, 제러미 보엔의 이 책은 6일 전쟁에 초점을 맞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당시의 상황을 시간대별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나면 전쟁의 결과 뿐만 아니라, 찰나의 짧고 긴박한 순간에 참과 거짓을 판별해 국가의 운명을 결정해야 하는 고민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폭력 덕에 이들은 다른 때 같으면 얻지 못할 유명세를 얻었다. 팔레스타인 민족이 오슬로 평화회담에 눈을 돌리고 있을 당시 극단주의자들은 여론의 변두리에서 아등바등했다. 폭력은 극단에 있는 자들을 주류로 밀어넣는 법이다. 점차 많은 사람이 팔레스타인 극단주의자들의 피비린내 나는 담론에 귀 기울였고 아리엘 샤론은 팔레스타인 민족을 추방해야 한다고 떠벌리는 인사들을 내각에 임명했다. 라빈이 재임하던 시절 팔레스타인 인들은 점령이 끝나가고 있다고 믿었고, 자살 폭탄은 서안지구와 가자에서 빠르게 인기를 잃었다. 이제 그가 사라지자 이스라엘 전차가 거리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자살폭탄 테러리스트들은 대중의 호응을 되찾아가고 있다.
- p. 485. 전쟁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