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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Feb 02. 2021

낭만과 꿈을 가장 먼저 팔았던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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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되면 하고 싶은 게 많았더랬지, 친구들과 갓 나온 주민등록증을 들이밀며 술집에 들어서고, 영화관에서 19금 딱지가 붙은 영화를 보고, 클럽에 가는 그런 것들. 오로지 나이의 제한만 풀리면 분출시킬 수 있는 내밀한 욕망을 품으며 발칙한 궁리를 해보곤 했다.



그것뿐이랴, 대학생이 되어야 즐길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하고 싶었다. 젊음, 열정 그리고 유흥이 뒤엉킨 축제를 즐기는 것, 두꺼운 전공 서적을 들고 캠퍼스를 거니는 것, 강의실에서는 꿈꿔온 지식에 관해 토론하고 틈틈이 잔디밭에 앉아 낭만을 즐기는 것들까지도. 고등학생 때는 그렇게 자유와 열정이 가득한 캠퍼스 낭만을 상상하며 지독한 입시 생활을 버텨냈다.



하지만 정말인지 그땐 몰랐다. 대학생이 되자마자 목을 조르는 영수증에 낭만과 꿈을 가장 먼저 팔아버리게 될 줄은. 예술을 쫓아 관련 대학 학과에 진학했지만, 그 낭만은 한 학기에 400이 훌쩍 넘는 가혹한 학비를 지불하는 대가로 얻은 것이었다.



갓 성인이 된 딸은 부족한 형편에도 자식의 선택을 늘 믿고 지지했던 부모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고된 노동을 더 하면서까지 지원을 해주셨지만, 그만큼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늘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용돈 벌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수능 직후에, 미처 낭만을 실현해보기도 전에 참 일찍이도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4년을, 그중에서도 3년은 인천에서 서울까지 왕복 다섯 시간을 통학하면서 쉼 없이 일과 학습을 병행해왔다. 음식점부터 시작해서 카페, 빵집, 연회장, 공연장, 전시장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늘 시간을 쪼개가며 꽤 여유 없이 살았다.



하지만 물질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건 지독한 자기연민이었다. 나보다 좀 더 풍요롭다고 생각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내 처지를 비관하고 자신을 가장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기연민은 실로 비참하고 괴롭다.



그다음으로 찾아온 건 분노와 무력감이었는데,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처음 발 디딘 사회는 하필 꽤 냉정하고 탐욕스러운 곳이었다. 학생으로서 그리고 여자로서의 정체성만으로 얼마나 나약한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깊이 스민 사회의 불합리한 구조를 참 지겹게도 느꼈다.



사람이 아닌 품평과 희롱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과 아직 어리고 여자라는 이유로 업무와 직위에서 은근히 배제되었던 것까지. 모르고 싶었던 은밀한 혐오는 종종 나를 화나게 했고, 감히 무엇도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젖어 들게 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자기연민, 분노, 그리고 무력감에서 가장 먼저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곳 역시 가정도, 학교도 아닌 일터에서였다. 그곳에는 내가 용돈과 생계, 이상과 현실 그 중간 어딘가에서 발버둥 치고 있을 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마음을 베풀던 사람들이 있었다. 



또 그곳에는 내가 나의 우울에만 매몰되어 있었을 때, 기꺼이 마음의 짐을 나눠서 지고 새로운 기회를 주며 시야를 넓혀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녹록지 않은 현실이지만, 종종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낭만이 찾아오기도 했다.



돈도 돈이지만 값을 매기기 어려운 경험을 벌 수 있었는데, 가장 큰 소득은 사람과 태도를 배웠다는 거다. 또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도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더 절실히 깨달으며 날 것 그대로의 나를 발견하는 탐구의 장이 되기도 했다. 거창할 것 없는 평범한 내 청춘이지만, 무엇하나 버릴 게 없는 것들이 가득하다.



그것이 비록 정처 없이 떠도는 감정과 잠깐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을지라도 그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음을 자부한다. 기쁨, 설렘, 유대, 슬픔, 좌절을 반복하며 쉼 없이 달린 게 결국 나에게 좋은 쓰임이 되었듯, 앞으로 과거를 복기하고 현재를 다짐하며 써 내려갈 날 것 그대로의 기록이 또 어딘가의 쓰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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