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낳은 세계. 존재하길 바라는 집단 소망이 빚어낸 꿈의 세계. 그러나 그 누구도 실질적으로 겪어본 적은 없는 세계. 바로 ‘사후 세계’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사후 세계를 단골 소재로 그려온 건 이러한 이유에 기인할 것이다. 알 수 없기에, 무한한 상상이 가능한 세계이니 말이다.
지난 19일 첫 방송을 시작한 JTBC 토일 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 역시 사후 세계를 한껏 상상하며 그려낸 작품이다.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대상작 <눈이 부시게> 제작진과 김혜자의 재회, <나의 해방일지>로 범 대중의 눈에 들어온 손석구의 만남으로 일찍이 기대를 모았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일수꾼 해숙(김혜자)의 현생에서의 이중생활로 시작된다. 밖에서는 거칠고 무대포 일수꾼으로 통하는 해숙이지만, 집에만 오면 남편 낙준(박준) 앞에서 다정한 아내로 얼굴을 갈아 끼운다. 그녀가 일수꾼이 된 이유도 하반신 마비로 침대 신세를 지고 있는 남편을 건사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독해져야 했다. 그로 인해, 가는 곳마다 욕과 오물 세례를 받지만. 남편 낙준은 아내의 그런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미안하고, 그래서 고맙고,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드라마는 낙준이 세상을 떠난 1년 후 해숙도 세상과 이별하면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다.
저승사자의 안내를 받아 저승으로 가는 지하철에 오른 해숙. 지옥으로 떨어지리란 예상과 달리 그녀가 당도한 곳은 천국이다. 천국에 온 사람들은 공항 검색대 같은 곳을 통과하며 이승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단순한 물건들이 아니다. 저마다의 사연이 깃든 물건이다.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보육원에 보냈다는 한 여성은, 아이들을 다시 찾으려고 차곡차곡 불린 통장을 손에 들고 눈물 흘린다. 이 통장을 아이들에게 꼭 전해달라고 애원하면서. 화재 사고로 천국에 온 소방관은 산소마스크를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화재 현장에서, 자신이 어떻게든 지키려 했던 소녀가 썼던 마스크여서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자’의 안위를 생각하는 이들의 태도에서 ‘아, 여기가 천국이 맞구나’ 싶어진다.
검색대를 통과한 이들은 개별 상담사를 만난다. 여기서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이색적으로 하는 질문(설정) 두 가지가 망자들에게 주어진다. 첫째, “천국에서 누구랑 함께 살고 싶으신가요?(지정한 상대도 나를 선택해야 함께 살 수 있다.)” 둘째, “천국에서 몇 살의 모습으로 살고 싶으신가요?”다. 간단해 보이는 두 질문은 사실 거대하다. 삶의 궤적에서 만난 인연들을 반추하지 않고서는 선택하기 힘든 질문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건 슬프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다시 또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설정 또한 이 안엔 들어있다. 이 질문 앞에서 시청자들도 아마 지난 인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그렇게, 사후 세계를 통해 역설적으로 현생의 삶을 더 돌아보게 한다.
실제로 이곳 천국을 움직이는 건 현생에서의 인연이다. 병수발을 해 준 시어머니가 너무 고마워, 다음 생에는 자기 아이로 꼭 태어나 달라 부탁한 며느리는 천국에서 시어머니와 ‘아이와 엄마’로 재회한다. 인간만이 아니다. 주인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보여준 반려견들은 무지개 다리를 건너 천국에 온 후에도 주인들을 기다린다. 조건 없는 사랑, 무조건적인 믿음…. 생과 사를 뛰어넘는 관계의 인연이 먹먹한 감동을 안긴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엔 삶과 죽음을 꿰뚫어내는 인연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인연의 고리 안에서 해숙이 선택한 사람은 당연히 남편 고낙준이다. 자, 이제 나이대를 선택할 차례. 하필 그때 낙준이 살아생전 했던 말이 떠오른다. “스물에도 예뻤고, 마흔에도 예뻤지만, (80대인) 당신 지금이 제일 예뻐요”라고 했던 말이. 그 말을 믿고 80대를 선택했는데, 재회한 남편(손석구)이 젊은 시절로 돌아가 있는 모습에 해숙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천국이 지옥으로 돌변하는 느낌에 해숙은 외친다. “이딴 게 무슨 천국이야. 이럴 바엔 차라리 지옥이 나았겠다. 이 나쁜 자식아!”
디분히 판타지스러운 설정에 강한 설득력을 부여하는 건, 김혜자의 내공이다. 무겁게 내려앉을 수 있는 소재에 낙관을 불어 넣는 것도 김혜자 특유의 사랑스러움이다. 거친 일수꾼과 다정한 아내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모습에서도 김혜자의 존재감이 감지된다. 이 작품엔 해숙의 속마음을 읊어주는 ‘내레이션 버튼’ 장치가 치트키로 등장하는데, 마음의 소리에 반응하는 김혜자의 시간차 연기 또한 일품이다. 김석윤 감독이 제작 발표에서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왜 ‘김혜자 프로젝트’라 명명했는지 납득이 된다.
회차가 조금 더 진행돼야 구체화 될 것으로 보이지만, <천국보다 아름다운>이 그리는 천국은 인간의 종착역이 아니다. 죄를 지으면 지옥으로 강등될 수 있고, 시기 질투 분노 거짓말을 해도 페널티가 주어진다. 천국주민센터 센터장(천호진)의 대사를 통해 드라마는 이곳 천국이 영원히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지나간 일들을 후회하느라, 내일은 또 뭐가 어떻게 될까 불안해하면서 애쓰느라 (현생에서) 제대로 못 살아 본” 이들에게 다른 삶의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눈이 부시게>에서 혜자(김혜자)가 했던 말을 소환한다. “지금 힘든 당신,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국제신문에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