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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Nov 06. 2017

'잘가요, 김주혁' 이 상실감은 그 부피가 크다 '잘가

'잘가요, 김주혁' 이 상실감은 그 부피가 크다 "잊지 말고 기억해 줘요

                                                                      

조금 이상하다. 김주혁이란 배우의 죽음. 타인의 죽음이 안기는 상실감이 너무나 가깝게 다가와서 정말이지 이상하다. 이는 비단 개별적인 감정이 아닌 듯하다. 영화인들은 물론, 대다수의 대중이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부고 앞에서 커다란 헛헛함을 느끼며 스스로 놀라는 분위기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인데, 가까운 지인을 잃은 기분이 든다’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어디에서 기인할까. 김주혁에게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은 있어도 그를 싫어했던 사람은 없기 때문일 테다. 이 배우가 연기해 온 캐릭터들이 상상 이상으로 우리 곁에 깊이 침투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김주혁은 손에 닿지 않을 것 같은 숭배의 대상보다 현실에 발 딛고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남자를 주로 연기했다. 아니, 바로 잡자. 자칫 비현실적으로 보일법한 캐릭터들도 김주혁이 부여한 섬세한 ‘결’ 안에서 현실성을 입고 우리에게 공감을 줬다. 그래서 지금 이 죽음에 대해 느끼는 공허함은 단순히 한 배우의 죽음을 넘어, 우리 곁에 머물러 있던 여러 인물과의 작별로 다가온다. 이 상실감은 그 부피가 크다.

‘죽음’은 역설적이게도 떠난 자의 ‘삶’을 가장 강렬하게 떠올리게 한다.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SNS 등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안타까움의 상당수가 단순한 ‘애도’에 머물지 않고 김주혁에 대한 세밀한 추억들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함께 무대 인사를 다니며 ‘속이 깊구나’ 자주 만나고 싶었던” 후배로(배우 문성근), “시네마테크 후원자이기도 했던” 영화를 사랑하는 배우로(김성욱 프로그래머), “일본 지진이 났을 때 제일 먼저 연락해줬던” 속 깊은 선배로(배우 유민), “1회 게스트 출연 당시 스케줄을 며칠씩 빼가며 너무나 열심히 해 줬던” 호스트로(김창동 PD), “주연배우가 살며시 나가려다가 내가 깨자 ‘미안해 좀 더 자’라며 매우 미안했다”던 사려 깊은 배우로(<청연> 스태프), 사람들은 그를 추억했다. 그리고 술을 못 마시는 탓에 뒤풀이 자리가 불편한 행사 중 하나라는 한 시나리오 작가는 “누군가가 건넨 술잔을 받고 난감해하는 내게 그(김주혁)가 ‘나도 못 마셔요. 사이다 괜찮죠?’ 하며 사이다를 따라주었을 때, 삭막하게 느껴졌던 영화 일을 더 해도 괜찮을 거 같다는 희망을 봤다”라고 했다. “누구든 지나칠 수 있었던 그 아주 작은 배려 덕분에” 따뜻했다고 했다. 


고인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많은 추억담을 통해 김주혁이란 사람의 퍼즐이 맞춰진다. 사려 깊었던 사람, 따뜻했던 선배, 스타 특유의 허세가 없었던 배우, 배려가 몸에 스며있었던 남자… 김주혁은 그런 배우였음을, 우린 안타깝게도 그를 보내고 나서 이렇게 확인하고 안타까워한다.

‘애도의 대상’이 된 김주혁은 ‘애도하는 자’로 깊이 각인된 인물이기도 하다. 아버지이자 배우인 고(故) 김무생의 마지막 가는 길. 상복을 입고 아버지의 마지막을 배웅하던 김주혁의 슬픈 얼굴은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워지지 않고 하나의 장면으로 박제돼 있다. 2년 전, 그가 어머니를 잃었을 때 역시 대중은 상실한 자의 슬픔을 TV를 통해 간접적으로 바라봤다. 여러 작품에서 함께 공연한 동료 배우 장진영과의 인연은 또 어떠한가. 장진영이 떠나고 그녀를 기리기 위한 특별전에서 <청연>(2005)이 상영될 때, 김주혁은 우리 곁에 남아 떠난 이를 함께 추모하던 자였다. 


어떤 이들은 김주혁이 괜히 외로워 보인다고 했는데, 이는 그가 인생에서 상실하는 것들을 우리가 너무 자주 접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누군가는 예능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에 김주혁이 출연했을 당시 그의 ‘텅 빈 냉장고’가 너무 슬퍼 울컥했다고 했다. 냉장고마저 너무 외로워 보였던 그가 더 이상 외롭지 않길 바랐다고 했다. 그런 그가 그렇게 허망하게 떠났다. 누군가를 함께 애도하던 이를 애도하게 되는 일. 삶이란 누구에게나 유한한 것이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기에 허무하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가 이토록 가까울 수 있다는 사실에 긴 한숨이 토해져 나온다.


그래도 김주혁이 외롭기보다 행복했으리라 짐작하는 것은 그의 사람들 때문이다. 김주혁 곁에는 사람이 많았다. 무엇보다 17년 동안 그의 곁에는 그 스스로가 “친형보다 더 친형” 같은 이라고 자랑스러워했던 동반자, 나무엑터스의 김종도 대표가 있었다. 하루아침에 돌아서기 쉬운 정글과도 같은 연예계에서 그토록 긴 시간, 믿고 따를 형 같은 존재가 있었던 것은 김주혁의 커다란 복이었을 것이다. 많은 배우가, 그리고 많은 매니저가 그와 그의 매니저 사이를 부러워한 이유였다. 그래서 이 죽음은 또 한 번 슬프다. 남은 자의 슬픔이 너무 크게 잡혀서 너무나 슬프다.

김주혁의 부고 소식을 듣고 그에 대한 장면들이 두서없이 머리에 엉켰다. 어디서부터 그를 기억하는 게 좋을까. 많은 이들이 그렇듯 김주혁이란 배우를 처음 눈여겨본 것은 <싱글즈>(2003)에서다. <싱글즈>에서 김주혁이 연기한 인물은 잘 나가는 증권맨 수헌이다. 일과 사랑 앞에서 고민하는 스물아홉 나난(장진영)에게 나타난 구원투수 같은 수헌은 분명 ‘백마 탄 왕자’로 보일 가능성이 농후한 캐릭터였고, 아마 제작 단계에서도 이 캐릭터는 그렇게 설정됐을 게다. 수많은 멜로드라마에서 워낙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정형화될 가능성이 큰 인물. 그러나 수헌은 김주혁이 부여한 육체성 안에서 너무 멋있어 보이는 척하지 않는, 적당히 귀엽고, 실수도 하고, 능글능글 맞기도 한 인물로 현실성을 입었다.


<싱글즈>를 다시 꺼내 보다가 울컥했던 건, 수헌이 나난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김주혁이 대중에게 다가온 방법과 흡사하다는 걸 새삼 발견해서이다. 영화에서 수헌은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씩 흘리는 방법으로 나난에게 다가간다. 나난이 일하는 레스토랑에 하루는 대학 동창을, 하루는 고등학교 동창을, 또 하루는 유치원 동창을 몰고 가며 나난의 일상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단칼에 휘둘러 상대의 마음에 꽂히기보다, 알 듯 모를 듯 주변을 돌다 어느새 ‘아, 그 사람이 곁에 있었지’ 깨닫게 하는 수헌은 그러고 보니 김주혁이 대중에게 다가온 방법과 유사하다.

005년은 배우 김주혁의 인생에 그 의미가 다소 남다른 해였다. 아버지 김무생과의 이별이라는 슬픔이 있긴 했지만, 배우로서 여러 가지를 증명해 보였다.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서 대통령의 딸(전도연)과 사랑에 빠지는 열혈 형사 최상현으로 분해 대중적인 사랑을 얻었고, 그해 11월 <광식이 동생 광태>로 전국 짝사랑 남들의 마음을 울렸다. 한 달 후 개봉한 <청연>이 친일 논란을 겪으며 제대로 된 작품 평가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비운을 겪긴 했지만, 김주혁이라는 배우의 존재감만은 확고하게 심었다.


이중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김주혁이 보여 준 연기는 많은 이들에게 깊이 박혔다. “인연이라는 건 운명의 장난이나 실수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는 명대사를 남긴 영화에서 김주혁은 운명의 실수로 사랑하는 여자(이요원)를 놓치는 광식이를 연기했다. 물론 이 운명의 실수는 광식이의 우유부단함에서 기인하는 바가 컸다. 사랑하는 여자가 흘리는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라는 단서를 잘 줍지 못하고 매번 놓치는 바보 같은 남자를 김주혁은 너무나 그럴싸하게 소화해 내며 캐릭터에 입체성을 부여했다. 고백의 기회를 매번 놓칠 때, 오해를 풀 있는 기회를 소심함으로 날려버릴 때, 진심을 내뱉지 못하고 삼켜 버릴 때, 사랑하는 여자의 결혼식에서 슬픈 축가를 부를 때, 혼나는 소년처럼 쭈뼛거릴 때, 광식은 멜로드라마 공식 속 남자의 전형을 뚫고 나와 우리 주변 이웃 같은 모습으로 공감을 샀다.

이후에도 많은 영화에서 김주혁은 소심함과 지질함으로 실수를 연발하는, 허우대는 멀쩡하나 뭔가 나사 하나 풀린 것 같은 ‘보통의 남자’를 그려내며 한국 영화계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했다. 김주혁은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바뀌는 남자 우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뷰티 인사이드>(2015)에서 여주인공(한효주)에게 이별을 고하는 우진으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여러 배우가 우진을 돌아가며 맡는 설정으로 인해 자칫 감정 몰입이 안 될 수 있었던 ‘이별의 순간’이 정서적으로 큰 울림을 준 데에는 김주혁이 부여한 감정의 공이 컸다. 이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우진의 복잡다단한 마음들을 김주혁은 절묘한 음성과 말투와 제스처와 눈빛과 돌아서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실어 표현해냈다.


특히 그가 그려낸 매력은 혼자 빛나기보다 상대배우의 매력에 힘을 보탠다는 점에서 귀했다. <싱글즈>의 나난이, <아내가 결혼했다>(2008)의 인아(손예진)가, <비밀은 없다>(2015)의 연홍(손예진)이,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의 민정(이유영)이 한국 영화계에서 존재감 있는 여성 캐릭터로 거론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 캐릭터들을 잘 받아준 김주혁의 절제가 한몫했다. 남성 캐릭터에 무게중심이 쏠린 충무로에서 분명 특별한 능력이었고,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멜로드라마 안에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한국의 휴 그랜트’라는 수식어 안에 갇혀 있기를 거부했던 김주혁은 여러 장르에서 자신을 실험해 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의 최근 행보는 여러모로 의미가 컸고, 결실도 있었다. <비밀은 없다>를 시작으로 <공조>(2017)와 <석조 저택 살인사건>(2017)을 거치며 이전에 없던 악역 연기를 선보인 그는 최근 종영한 드라마 <아르곤>에서 또 다른 얼굴은 꺼내 보이며 ‘다음 행보’에 대한 기대감을 투척했다. 그 스스로도 매우 즐거워 보였다. 그래서 이 죽음은 더욱 허망하고 아프다. 힘껏 날아오르던 그의 비행이 너무 빨리 마감돼 슬프다.


김주혁에 대한 추모 기사를 쓰며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그가 불렀던 ‘세월이 가면’을 무한 반복하며 듣고 있다. 7년간 마음에 품고 있었던 여인을 보내며 그는 ‘세월이 가면’을 온 힘으로 불렀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랑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 줘요”


당신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겁니다.


http://magazine2.movie.daum.net/movie/46464 (다음 매거진, 11월 2일 기고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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