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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Aug 10. 2021

이 여름, ‘조인성’이 분다

주말 밤만 되면 TV 앞으로 몸을 던졌다. 2004년 초였다. TV 사수의 목적은 <발리에서 생긴 일> 본방사수였다. OTT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절, 본방사수는 드라마 팬이 할 수 있는 충성 서약 같은 것이었다. 숱한 ‘발리 러버(Bally Lover)’를 양산한 <발리에서 생긴 일>은 하지원 조인성 소지섭 박예진 네 남녀의 사랑이 현대판 신분제와 함께 삼각-사각형을 이룬 드라마였다. 스토리는 빤한데 드라마는 빤하지 않았다. 기이하게 변형된 캐릭터들 때문이었다. 나는 가진 것 없는 이수정(하지원)이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유형의 기존 여주인공들과 달리 신분 상승에 대한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라는 게 좋았다.      


이수정보다 더 흥미로웠던 건 조인성이 연기한 정재민이었다. 자본주의 수혜를 입은 재벌가 아들로 태어났지만, 세습 받은 것들로 인해 오히려 억압받은 인물. 이수정을 만난 후 맹목적인 사랑에 눈뜨지만 그 사랑을 지킬 줄 몰라 여자를 아프게 했고, 수정을 해치겠다는 자기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남자. 그렇게 수정을 떠나고도, 잊지 못해 그녀 곁을 맴돌며 질투의 삽질을 판 찌질이. 그러나 조인성이 온몸에서 내뿜는 아름다움과 이를 스스로 배반하는 유약함, 그 낙차에서 발생하는 매력은 대단히 치명적인 것이어서 판타지와 모성애를 동시에 자극했다.      

실로 나는 ‘찌질하다’와 ‘멋있다’가 한 그릇에 담길 수 있다는 걸 정재민을 보며 깨달았다. 사랑하는 여자 때문에 이 ‘앙’물고 어린아이처럼 오열하는 신에선 그간 드라마에서 본 배우들의 눈물 연기가 얼마나 미화돼 있었는가를 확인하기도 했다. 이 오열 신은 이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코믹하게 패러디됐는데, 나는 그것이 눈물의 리얼리즘을 건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파급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입틀막’을 부르는 공포영화가 등장할 때마다 ‘조인성 입틀막’이 관객들 사이에서 비유로 소환되는 광경도 종종 목격된다.     


<아스팔트 사나이>의 정우성을 보며 “나도 한번 저렇게 멋지게 TV에 나와보고 싶다”라고 꿈을 품었던 조인성은 <발리에서 생긴 일>을 통과하며 수많은 꿈나무가 “나도 저렇게 조인성처럼 TV에 나오고 싶다”라고 로망 하는 스타가 됐다. 출세작은 배우 인생의 거대한 예고편이 되기도 하는데, <발리에서 생긴 일>이 그랬다. 정재민은 이후 조인성이 연기한 캐릭터 안에 고요하게 스며들어 다양한 형태로 변주, 조인성이라는 배우의 정체성이 됐다.      

<봄날>의 고은섭, <쌍화점>의 홍림,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오수, <괜찮아, 사랑이야>의 장재열까지. 조인성이 연기한 인물들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는 듯 보였고, 단단해 보이는 얼굴 뒤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불안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내 여자를 위해 울어주는 남자라기보다, 내 여자 앞에서 울 것 같은 남자. 상처 입을까 두려워하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돌진하고야 마는 순정 마초. 우리나라 멜로 드라마 신에서 조인성이 확보한 세계는 그렇게 각별한 것이었다. 통속극의 정형화된 백마 탄 왕자가 아닌, 통속적인 캐릭터를 조인성‘화’ 하는 방식으로 그는 상종가를 쳤다.      


운도 따랐다. 노희경 작가와의 만남이 그렇다. 멜로 장르라도, 그 안에 ‘인간’을 그려 넣는 노희경의 작법 안에서 조인성의 멜로 연기는 입체감을 입었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 <괜찮아, 사랑이야> <디어 마이 프렌즈>를 함께 하며 조인성과 지켜본 노희경은 이런 말을 했었다. “아마추어에게 필요한 건 자신감이고, 프로에게 필요한 건 의심이다. 조인성은 철저한 프로다. 그는 늘 자신을 의심하며, 현장의 스태프들에게 자신의 단점을 지적해 달라고 요구하고, 그 지적이 왔을 때 단 한 번도 뿌리치지 않고 적극 수용한다. 나는 그런 조인성을 동료로서 인간으로서 존경한다.” 아…앞선 문장을 다시 고쳐 쓴다. ‘운도 따랐고, 운을 나누기도 했다’라고. 노희경 작가에게도 조인성과의 만남은 운으로 기록된 것 같으니.     

눈물은 한때 조인성의 서명이요,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러나 자신을 의심하고 단점을 적극 수용하는 조인성은 2016년 <더 킹>을 기점으로 눈물을 덜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오래전 <비열한 거리>에서 삼류 깡패 조직의 넘버2로 분해 멜로 드라마 밖에서의 존재감을 성공적으로 드러낸 바 있고, 이 연기로 대한민국영화대상 남우주연상 트로피도 안았다. 그러나 <비열한 거리>가 다소 예상 가능한 범위에서의 변신이었다면, 최근의 도전은 일차원적인 변신보다는 영역 확장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아 흥미롭다. 정치풍자극 <더 킹>에서 대한민국 30년 현대사를 투사하고, 액션 사극 <안시성>에서 규모의 압박을 견디더디, <모가디슈>에선 심지어 중심에서 한 발 뒤로 물러 서 있다.     


<모가디슈>에서 조인성은 안기부 출신의 정보요원 강대진 참사관을 연기했다. 호평과 동시에 다소 기능적인 캐릭터 연기였다는 일각의 반응도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는 ‘조인성 표’ 강대진 덕분에 <모가디슈>의 메시지를 실어나르는 대사관 한신성(김윤석)의 의중이 더 깊게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극 중 강대진은 선배인 한신성에게 적당히 예를 갖추면서도, 중요한 순간엔 안기부 출신이라는 권력을 얍삽하게 내비친다. 이에 대처하는 한신성의 행동은 영화가 품은 주제로 연결되는데, 이처럼 조인성은 뒤로 물러서 상대 캐릭터에 힘을 토스하고도 두둑한 존재감을 빛낸다.      

강대진은 온갖 ‘척’은 다하지만 그다지 멋이 나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조인성이 부러 이 인물의 멋짐을 꺾고 있기 때문이다. 멜로 장르 안에서 찌질하고 유약하게 이미지를 변형시켰듯, 그는 멜로 밖의 영역에서도 인물을 자신의 차원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겐 <모가디슈>가 조금 더 넓어진 조인성을 만난 영화로도 기억될 것이다.      


그나저나 <발리에서 생긴 일> 리메이크 소식을 몇 년 전 들었는데, 준비하고 계신 분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세상엔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리메이크가 있는데, 이 드라마가 그렇다고 믿는다. 어떤 배우가 정재민을 연기하든 그 특유의 매력은 발산할 테지만, 그것이 조인성의 정재민을 넘을 수는 없을 테니까.     


('씨네플레이'에 기고한 배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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