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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Aug 14. 2021

‘민초단’과 ‘오싫모’와 취향

기질적으로 나는 세상에 맞서 자신의 취향을 독야청청 부르짖는 이들에 눈길이 오래 머문다. 다양한 취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그만큼 재미있을 거란 믿음에서다. 그 믿음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취향이 활발하게 이야기되는 것이 한 사회의 다양성 확장에 얼마나 긍정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요즘 생각이 조금 많다. 이야기는 ‘민트초코’에서 시작한다.       


얼마 전 술자리에서였다. 누군가 신상이라며, 갓 출시된 민트초코 맛 우유를 가지고 왔다. 호기심에 한 모금 마시고 우유 패키지를 찍어 SNS에 올렸더니 여기저기서 메신저가 날아들었다. “기자님, 혹시 민초단(민트초코 신봉자)이세요?” “너, 민초단이었냐?” 반색과 난색이 오가며 정체를 밝히라 요구하니, 술 마시다가 졸지에 ‘나는 민초인가, 반(反)민초인가’ 존재론에 빠졌다. “혹시, 당근이세요?”라고 길거리에서 누군가 물어왔을 때보다 난처한 질문. 세상 모든 음식엔 고유한 맛과 향과 멋이 있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에서 취향에 따른 호오(好惡)가 가장 홍해처럼 갈리는 것이 민트초코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마침 술자리에는 오이를 못 먹는다는 이유로 구박과 핍박의 성장기를 거친 지인이 있었는데,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며 그 유명한 ‘오싫모’(오이를 싫어하는 모임) 회원 출신이다. 많은 오싫모 회원들이 그렇듯, 그녀에게도 타인과의 식사 자리에서 오이 혐오를 밝히면 “웬 편식이야!" 윽박지름을 당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던 날들이 있었다. 오이 하나 못 먹는다는 이유로 유난 떠는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서러운 세상. 10여 년 전, 썸 타던 남자가 싸 온 김밥에 오이가 싸~악 빠져 있는 걸 보고 점수를 크게 얹어줬다는 에피소드를 들으면 누군가의 취향을 존중해준다는 게 연애사에서도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실감하게 되는데, 그 남자친구가 그녀의 지금 남편이다.      


돌이켜보면 오싫모는 자신들의 취향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첫 무리였다. ‘개인이 싫어하는 것을 존중하는 태도’를 의미라는 ‘싫존주의’를 세상에 알린 선도자들이기도 하다. 대다수가 즐기는 걸 싫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혹은 모두가 싫어하는 걸 좋다고 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개인’보다 ‘공동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회에서 무리에 반하는 취향을 주장하면 유별난, 까탈스러운, 산통 깨는 사람으로 취급받곤 했으니까.      


그러나 오싫모가 오이 사이에서 행복할 권리를 외칠 즈음 세상은 달라지고 있었다. 오싫모와 민초단 사이에도 세상은 크게 바뀌었다. 이젠 좋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 몰두하는 것. 반대로 어떤 것을 왜 사랑할 수 없는가를 온 힘을 다해 표현하는 것은 자기 존재 증명의 일환이고, 거짓말 조금 보태 ‘시대정신’이 됐다. 취향이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태어난 곳이 영남이냐 호남이냐, 어느 고등학교를 나와 어느 대학을 다녔는가는 이제 이전만큼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떤 음악을 즐겨 듣고, 어떤 책을 읽으며, 어떤 라이프 스타일을 지향하는가. 별다방과 콩다방과 진짜 다방 중 어딜 더 선호하는가가 그 사람을 더 잘 설명한다고 여겨진다.      


취향의 위상 변화는 여러 분야에서 감지된다. 대표적인 게 오타쿠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한때 오타쿠는 사회성과 사교성이 결여된 인물을 칭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컸다. 그러나 ‘오덕후’ 혹은 ‘덕후’라는 온화한 한국 발음으로 현지화를 거치더니, 어떤 특정 분야에 전문가 이상의 심미안과 열정을 가진 사람이란 긍정의 뜻으로 의미 변형을 이뤘다. 이젠 많은 이들이 ‘덕업일치(덕業一致, 덕질과 직업이 일치)’를 꿈꾸고, ‘성덕(성공한 덕후)’이 되기 위해 ‘덕력(力)’을 모으며, ‘덕통사고’ 당하길 희망해 바라지 않는다. 편견과 차별의 요인이었던 덕후 DNA가 사회 우성인자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비즈니스 시장 역시 취향을 크게 타는 중이다. 기존에는 광고와 마케팅이 취향을 조장하는 면이 있었다. 이를테면 ‘모두가 꿈꾸는 그곳’(자이 아파트), ‘보라색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현대카드), ‘남자에게 참 좋은데’(산수유) 같은. 특별해지고 싶으면 그것을 취해야 한다고 속삭이며 획일화된 소비를 하도록 유도했다.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취향이 산업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민초단’이 그렇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기호를 밝히는 데 머물지 않고 신흥 밈(meme)을 양산하며 산업의 큰손으로 떠올랐다. 식품업계가 민초단을 잡기 위해 신제품 개발에 힘 쏟고 있는 이유다. 유행에 민감도 대중문화도 빠르게 움직였다. 지난해 방영된 드라마 <구미호뎐>에선 600년 묵은 구미호(이동욱)가 ‘간(肝)’ 대신 ‘민트 초코’ 즐겨 먹는 민초 러버로 설정됐다. 스타의 민초 취향은 연예부 기자들이 사랑하는 기삿거리이기도 하다. 속보, 인기 아이돌 A 뼛속까지 민초단!      


취향 시대의 도래는, 소셜 미디어 발달과 맞물린다. 소셜 미디어는 개인 정보과 취향의 저장고다. 가입자들이 자발적으로 올린 글과 사진이 그것이다. 업로드된 사진 한 장은 곧 그가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다. 이런 소셜 미디어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연결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팔로우’라는 기능이 있고, 관심 키워드를 모아주는 해시태그(#)도 있다. 인터넷 기술 발달로 취향과 접속하는 일도 쉬워졌다. 콘텐츠 플랫폼들은 이용자의 취향을 알고리즘으로 분석해서 맞춤형 콘텐츠를 척척 띄워준다. 유튜브에서 노래 하나 검색해서 들으면,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들이 끊임없이 추천되는 식이다. 포털사이트 뉴스도 넷플릭스 같은 OTT도 스포티파이 류의 음원 사이트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끝난다면 ‘취향의 시대’ 이야기는 해피엔딩일 것이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맞춤형 정보를 편리하게 제공 받고, 비슷한 취향의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으니 아름다운 결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여기엔 거대한 딜레마가 있다. 걸러진 취향의 콘텐츠만 소비하다 보면 편향된 정보의 거품에 갇힐 가능성이 큰데, ‘필터 버블’이 그것이다. 나와 다른 의견들을 살피며 균형 잡힌 시각을 찾아가려는 노력도 이 과정에서 휘발되기 쉽다. 콘텐츠 큐레이션이 안기는 ‘확증 편향’ 현상은 이미 사회 곳곳에서 부작용을 드러내는 중이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취향이 곧 정체성으로 직결되는 시대라는데, 정보 필터링이 난무한 환경에서 형성된 취향은 온전히 나의 기호로 이뤄진 것인가. 단절된 세상에서 제한된 취향만 습득하고 있는 건 아닌가. 타인의 취향을 나의 취향이라 착각하는 경우는 없을까.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을 쉽게 ‘언팔’할 수 있는 시스템은, 취향이 뻗어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건 아닌가.      


참 아이러니한 부분인데, 획일화된 사회에 다양성이란 숨통을 틔워주는 역할을 해 온 취향 존중이 어떤 부분에선 너무 존중받음으로써 다른 취향들과 벽을 세우고 있는 형상이다. 취향은 분명 넓어지고 있는데 동시에 좁아지고 있는 느낌이랄까. 같은 취향 속에 갇혀 살다 보면, 그것만이 진짜 세계라고 믿게 되기도 한다. 자신의 취향과 맞는 사람이나 장소를 발견했을 때 우린 ‘취향을 저격받았다’고 한다. 더 많은 ‘취향 저격’이 있기 위해선, 미성숙한 부분에 대한 과녁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 그래서 너의 민초 취향은 무엇이냐고? 민초파의 탈을 쓴 중립자입니다.     


<GQ코리아 7월호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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