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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Nov 11. 2021

<이터널스> 마블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개국공신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의 퇴장과 함께 화려한 10년을 마감한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Next Level'로 넘어와 더 넓은 광야에 기틀을 다지고 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마블의 기둥과도 같았던 배우들의 퇴장을 메워줄 새로운 캐릭터 전선 구축일 것이다. 나타샤(스칼렛 요한슨)에서 옐레나(플로렌스 퓨)로의 바통 터치를 그린 <블랙 위도우>로 '페이즈4'의 포문을 연 마블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로 아시아 최초 히어로를 소개하며 외연 확장에 대한 뜻을 천명했다. 세 번째 주자로 출격한 <이터널스>는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히어로 영화는 어차피 '뻥'의 세계다. 여러 '뻥' 중에서도 이터널스의 '뻥' 은 원대하고 거대하다. 인류의 문명이 꽃핀 순간순간마다 이터널스라 불리는 우주에서 온 종족이 지식 전수자 역할을 했다는 '뻥'을 친다. 그러니까, 인류 문명사를 마블 세계관 안에서 재정립한다.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신령님, 용왕님, 삼신할머니 등등 당신이 믿는 존재가 무엇이 됐든, 그 이전에 이터널스가 있었다고 말이다. 흥미로운 설정이다. 덕분에 <이터널스>의 스케일은 히어로물 안에서도 방대하다. 기원전 7000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출발해 바빌론, 아즈텍 제국, 굽타 제국, 1945년 히로시마까지 인류 역사와 중요한 순간을 종과 횡으로 두루 훑는다. 시공간 활용은 가히 최고다.


오스카 2관왕 클로이 자오의 마블 입성


<이터널스>의 메가폰을 잡은 클로이 자오는 최근 가장 발 빠르게 자신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창작자다. 아트하우스 영화 <노매드랜드>로 올 상반기 오스카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했고, 하반기에는 이렇게 엔터테인먼트 산업 최전선에 있는 마블 프로젝트에 올라탔다. 극과 극의 체험. 작가주의 연출력을 인정받은 후 히어로 무비까지 꿰찬 감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1년 안에 뚝딱 해치운 경우는 클로이 자오가 최초다. 그래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클로이 자오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도 자기만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까.

<노매드랜드>가 증명했듯 클로이 자오는 인간 내면의 형상을 잘 그려내는 감독이다. 이러한 장점은 아무래도 볼거리 위주의 히어로 영화 안에선 희석되기 쉽다. 물론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나이트> 시리즈에서 인물들의 심연을 깊게 건드려 관객을 홀렸듯,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쉽지 않다는 것일 뿐. 아쉽게도 <이터널스>에서 클로이 자오는 '쉽지 않다'는 확률을 높인다. 뭐라고 해야 할까. 머릿속에 정립된 자기만의 비전은 확실히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전달하는 요령이 부족하달까.


클로이 자오는 7000년에 걸친 역사를 펼쳐내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것을 흥미로운 볼거리로 이어 붙이지는 못했다. 이터널스와 인간이 교감하는 과정이 피상적으로만 그려져 재미가 없고, 캐릭터들은 종종 역사의 백 배경으로만 움직이는 느낌이라 긴장과 감정이 쌓이지 않는다. 구구절절한 설명도 넘친다. 철학적인 주제를 히어로 장르에 능숙하게 녹일 방안을 찾지 못해 대사에 기댄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감독은 '자신이 잘하는 것'과 '잘 해내고 싶은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관객이 마블에 기대하는 오락성 결여


<이터널스>엔 마블 영화에 관객이 기대하는 센스와 오락성도 심하게 결여돼 있다. 10명이나 되는 히어로가 등장하지만, 개개인의 특질이 시너지를 이루는 장면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액션의 합 역시 마찬가지다. 가령 캡틴 옹호파와 아이언맨 옹호파가 '팀킬'을 하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워>의 공항 신을 우리가 좋아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액션의 아이디어가 창의적이어서기도 했지만, 각 캐릭터의 매력이 적재적소에 효율적으로 배치돼 흥을 배가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터널스>의 액션은 제각기 흩어질 뿐, 유기적으로 리듬을 타지 못한다. 심지어 내분으로 팀이 사분오열됐을 때 자리를 비우는 캐릭터마저 있는데, 아니 그 시간에 어디서 도대체 뭘 한 것일까. 여러모로 캐릭터를 영리하게 활용하지 못했다는 인상이 짙다.


너무 단점만 언급한다고 지치지 마시길. 더 큰 단점은 아직 이야기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패착은 마음 줄 캐릭터의 부재다. 일단 캐릭터 면면은 뚜렷하다. 다양한 인종과 성별, 연령뿐 아니라 성소수자와 청각장애인 등 계층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아우른 멤버 구성 덕이다. 지금 시대가 추구하는 다양성 가치를 이끄는 '프런트 러너(선두주자)'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는 나쁘지 않다.


문제는 다양한 인간군이 독자적으로 보유한 매력이 너무 미약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MCU의 거대한 매력이 캐릭터에서 뿜어져 나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심각한 결함이다. 캐릭터가 중심을 잘 잡고 있다면 상황이 조금 엉성하더라도 히어로 관객은 눈감고 용인해줄 마음이 있다. 그런데 <이터널스> 캐릭터들은 스스로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으니 내뱉는 대사나 행동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그나마 반가운 점이라면, 영화가 길가메시를 맡은 마동석의 매력을 제대로 짚고 있다는 점이다. <부산행>을 통해 마동석을 처음 봤다는 감독은 '마블리'로 사랑받는 그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마동석 특유의 '싸다구' 액션 역시 살아있는 편. 비중이 그리 크다 할 수는 없지만, 존재감은 약하지 않다. 혹여, <부산행> 때보다 그의 주먹 타격감이 덜하다 느껴진다 해도 하등 이상할 건 없다. '마블 영웅이 괴물을 때려눕히는 것'과 '인간이 좀비를 때려잡는 일'. 후자의 주먹이 더 생생하고 희귀하게 보이는 건 장르가 지닌 숙명이니 <이터널스> 자체의 단점은 못 된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마동석은 할리우드에서도 자신의 몫을 해낸다. 귀엽게, 살벌하게, 마블리스럽게.


<이터널스>는 마블 세계관을 모르고 봐도 감상에 큰 무리가 없다. 마블 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에게 진입장벽이 낮다는 말이다. 반대로 동종업계 히어로와의 전략적 품앗이를 일종의 놀이처럼 즐겨온 마블의 오랜 팬들에겐 뭔가 독립적인 작품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그럼에도 향후 MCU 전개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게 자명하니 안 보고 가기엔 애매한데, 확실한 건 <이터널스>가 전하는 충족감이 마블 영화 가운데 확연히 떨어진다는 사실이다. '마블 페이즈2'에 신입으로 등장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군단과 앤트맨이 MCU의 유머를 끌어올리는 효과를 톡톡히 하고, '마블 페이즈3'로 합류한 스파이더맨, 닥터 스트레인지, 블랙 팬서, 캡틴 마블이 MCU의 분위기를 흥미롭게 다변화시켜준 것과 비교하면 <이터널스>의 효과는 아직 잘 잡히지 않는다. 적어도 '마블 페이즈4'의 다음 행보에 기대라는 미끼를 투척해 주는 역할을 해주길 바랐을 마블 수장 케빈 파이기의 머리는 지금 상당히 복잡하지 않을까 싶다.


(시사저널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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