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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Oct 28. 2021

<듄> 목이 마르다…어서 파트2를!

SF 문학사의 교본이자,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SF 소설. 1965년 발간된 프랭크 허버트의 소설 [듄]이다. 네뷸러상·휴고상을 수상하며 대중성과 작품성 모두를 잡은 [듄]은 오랜 시간 영화계에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존재로 자리했다. 영화화에 도전한 자는 있었지만, 제대로 성공한 자는 없어서다. 1974년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당대의 예술가들과 영화화를 시도했으나 무산됐고, 리들리 스콧의 중도 하차를 거쳐, 1984년 데이비드 린치에 의해 드디어 영화화됐으나 불운하게도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미끄러지는 오점을 남겼다. 


[듄]의 영화화가 지지부진한 사이, [듄] 세계관에 영향받아 파생한 ‘스타워즈’ ‘에이리언’ 등의 시리즈가 영화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기는 역설적인 상황이 빚어진 것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하버트의 [듄]은 영화뿐 아니라, 게임과 음악 게임에도 물줄기를 대며 서브컬처 전반에 강렬한 영향을 미쳤다. 


이런 작품의 영화화에 도전한다는 것은 매혹적인 동시에 위험한 일이다. [듄]에서 영향받은 작품들로 인해 비교 대조군이 너무 많아졌을 뿐 아니라, 늦게 도착한 탓에 독창성 면에서도 원조임을 드러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원작 팬이 두터운 만큼, 그들 개개인이 책을 읽으며 그려 놓았을 상상력과도 싸워야 한다. 무엇보다 이 세계관은 너무 방대하다. 그런 부담 안에서 창작자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데이비드 린치 버전처럼 스튜디오의 입김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된서리 맞기 십상이다. 누가 이 독이 든 성배를 마실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등판한 인물이 바로 드니 빌뇌브다. ‘그을린 사랑’으로 영화계에 거대한 충격파를 안기고, 영상화가 난해하다 여겨진 테드 창의 SF 단편소설을 영화 ‘컨텍트’로 성공적으로 옮기고, 클래식의 반열에 오른 ‘블레이드 러너’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쓴 감독. 빌뇌브라면 [듄]의 험난한 영화화 여정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원작 소설의 열혈팬이기도 한 드니 빌뇌브의 프로젝트엔, 하버트의 또 다른 추종자들이 가세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한스 짐머다. 빌뇌브만큼이나 [듄] 덕후인 그는 이 영화 참여를 위해, 오랜 파트너이자 영화계 큰손인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 음악 작업을 고사하기도 했다. 그렇게 ‘듄’이 파트1이라는 주석을 달고 당도했다. 


‘모래언덕(dune)’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곳은 별 전체가 모래로 뒤덮인 ‘아라키스 행성’이다. 아라키스가 우주 황제와 힘 있는 귀족 세력들의 주요 침략지가 된 이유는 이곳에서만 나는 신성한 환각제 ‘스파이스’ 때문이다. 노화를 막고 수명을 늘리는 효능이 있는 스파이스는 그러니까, 진시황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불로초’와 유사하다. 값비싼 자원이라는 점에서 중동의 ‘석유’와도 비견할만 하다. 아라키스 원주민인 ‘프레멘’들은 스파이스를 노리고 침략해 오는 외부세력이 달갑지 않다. 


이러한 아라키스를 대하는 귀족 가문의 노선 차이는 뚜렷하다. 하코넨 가문이 무력으로 이곳을 통치하려고 한다면, 레토 공작(오스카 아이삭)이 이끄는 아트레이데스 가문은 토착 주민 프레멘들의 지혜와 손잡아 함께 살아가는 땅을 일구려고 한다. 그렇다면, 황제는? 두 가문 사이에서 정치를 한다. 손 안 대고 코 풀기. 자신의 존재감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미연에 차단하기 위해 황제는 우주의 뜨거운 감자인 아라키스 행성을 이용한다. 

역사는 되풀이되는가. 이 모든 게, 흡사 20세기 식민지를 둘러싼 열강들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알다시피 위기의 상황에 영웅이 등장하는 법이다. 세상을 구원할. 프레멘들은 레토 공작의 아들 폴(티모시 샬라메)에게서 그 희망을 본다. 

‘듄’은 원작의 그 방대한 세계관 때문에 진입 장벽이 꽤 높을 수밖에 없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드니 빌뇌브는 “소설을 읽지 않은 관객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일이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혔는데, 개인적으로는 몇 가지 세계관만 알고 가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 크게 문제 될 것 없이 꾸렸다고 생각한다. (여사제 집단 ‘베네 게세리트’에 대한 정보는 꼭 미리 숙지하길!)


오히려 나는 이 영화가 원작 팬들 사이에서 더 큰 이견을 낳으리라 본다.  6권의 책 가운데 고작 1권의 전반부만 펼쳐 놓았으니 활자의 시각화를 빨리 확인해 보고 싶었을 원작 팬 입장에선 성에 차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한껏 고조된 순간 가차 없이 영화를 끝내버리는 신공은 K-드라마 결말맺기를 뺨치기 한다. 


‘듄’은 건조하고 서정적이다. 이야기 전개도 저속으로 감아둔 인상을 주는데, 기-승-전-결의 확실한 구도를 취하지 않고 흐르는 것과 연관이 깊다. 가령 ‘듄’과 비견되는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이 각 편마다 독자적인 기승전결을 완수하며 달렸다면, ‘듄’은 파트2로 가는 길목으로 기능하는 면이 크다. 완결된 구성을 선호하는 관객 입장에선 영화가 다소 지루하게 다가올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듄’이 품은 장점과 가능성은 몇몇 단점들을 이겨낸다. 드니 빌뇌브는 이 험난한 미션을 마치 한 편의 ‘영상시’를 그려나가듯 써 내려간다. 시끌벅적하고 유쾌 통쾌해서 박진감 넘치는 쪽보다, 장엄하고 황홀하고 우아한 나머지 넋 놓게 되는 쪽에 가깝다. 사실감 있는 그림을 위해 CG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그의 집념은 헝가리, 요르단, 아부다비, 노르웨이 등의 사막 로케이션 촬영으로 이어졌는데, 덕분에 영화를 보는 내내 사막의 거친 질감이 감각적으로 만져지는 착각이 일기도 한다. 그리고 한편의 현대무용을 보는 듯한 군무. 그 자체로 ‘헉’ 소리 나는 미장센. 심장을 때리는 웅장한 사운드. 


“이건 시작일 뿐이야”라는 영화 속 대사는 ‘듄’ 파트1에 대한 적확한 한 줄 요약이다. 그리고 다음에 대한 기대를 펌프질한다. 이게 시작일 뿐이면, 본격 궤도에 오르는 파트2는 도대체 어떻다는 것인지. 극장이란 공간의 가치를 이토록 명징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얼마 만인가. ‘듄’은 흥행으로 작용할 만한 여러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호흡으로 승부하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여전히 존재함을 알리는 기분 좋은 기록이기도 하다. 이 글을 마치려는데 마침 ‘듄’ 파트2 제작 확정 소식이 들려온다. 빨리 주시길. 목이 마르니.... 


('데일리임팩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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