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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Mar 24. 2022

<스펜서> 신경쇠약 직전의 시집살이

1981년, 지구촌 7억 명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찰스 왕세자와 백년가약을 맺으며 영국 최고의 로열패밀리가 된 다이애나 스펜서. 그러나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류의 동화는 없었다. 남편의 불륜, 전통과 관습을 중요시하는 왕가의 보이지 않는 벽, 원만치 않은 시댁과의 관계가 다이애나를 오랜 시간 짓눌렀다. 결국 다이애나는 1995년 BBC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결혼에는 늘 세 명이 있었어요”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내뱉으며 보이지 않는 강을 건넜다. 이듬해, ‘세기의 결혼’이 종말하고 ‘세기의 이혼’이 그렇게 현실화됐다. 그것은 1년 후 닥쳐올 비극의 전조증상이었을까.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다이애나는 따라붙는 파파라치의 추적을 피하다 차 사고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나이 서른여섯. 영국 전체를 슬픔에 잠기게 한 이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애석하게도, 비극은 희극보다 더 잘 팔리는 법이다. 실제로 다이애나 이야기는 대중매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 재조명됐다. 올리버 히르비겔 감독은 <다이애나>(2014)에서 다이애나(나오미 왓츠)의 생애 마지막 2년을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풀어냈다. 사랑을 갈구한 여인의 비하인드 러브스토리를 그리겠다는 포부는 좋았으나, 안타깝게도 빈 깡통 같은 서사란 비판이 난무했다. 스티븐 프리어스의 <더 퀸>(2007)은 다이애나 사후 일주일을 따라붙는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위기를 맞은 군주제를 다이애나의 죽음을 통해 구성한 영화였다. 그런가 하면 영국 왕실을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은 시즌 4(2020)에서 다이애나와 찰스의 위태위태한 결혼 생활을 그려내며 다이애나를 연기한 신예 배우 엠마 코린에게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겼다. 이 밖에도 다이애나를 내 세운 수많은 다큐멘터리와 책과 드라마가 그녀를 추모하고 그리워했다.   

그렇다면 파블로 라라인이 <스펜서>에서 바라본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어떨까. 힌트는 감독의 전작이다. 라라인은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재클린 케네디를 그린 <재키>(2016)에서 한 인물의 내부를 모자이크처럼 펼쳐낸 바 있다.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그린 <네루다>(2016)는 더욱 독창적이었는데, 허구의 비밀경찰 오스카를 통해 실존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며 전통적인 전기영화와 멀찍이 거리를 뒀다. 인물을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데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감독의 성향은 <스펜서>에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스펜서>에는 관객이 으레 전기영화에 기대할 법한 사건 재현에 대한 관심이 누락돼 있다. 인물을 인생에서 크게 주목받은 주요 사건들 역시 배제됐다. 대신 영화는 1991년 다이애나가 샌드링엄 별장에서 시댁 식구들과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낸 3일을 통해 주인공 내면에 드리워진 콘트라스트에 집중한다. 다이애나의 황폐해진 심리를 클로즈업해, 갑갑한 왕실 안에서 그녀가 느꼈을 법한 심리를 온갖 상상력으로 시각화 한 것이다. 그러니까, <스펜서>는 전기영화를 가장한 심리 드라마다. 조금 더 거칠게 이야기하면 공포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신경쇠약 직전의 상황으로 위태위태하게 흔들리는 다이애나의 모습은 때론 그로테스크하게, 때론 잔혹 동화처럼 묘사됐다. 신경을 날서게 자극하는 음악과 음침한 기운을 머금은 미술 세트가 이 모든 것을 보조한다.  

적지 않은 영화엔, 자신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명징한 순간이 있다. <스펜서>에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채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영화 오프닝에서 다이애나는 홀로 차를 몰고 어디론가 달리고 있다. 초조한 얼굴과 불안한 몸짓. 영락없이 길을 잃은 자의 그것이다. 길을 헤매던 다이애나는 휴게소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묻는다. “여기가 어디죠? 제가 길을 잃었어요.” 그렇다. 이 오프닝은 다이애나가 자기 인생의 길을 잃었음에 대한 우회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스펜서>라는 제목은 왕세자비이기 이전에 스펜서였던 여자가, 허수아비처럼 살기를 요구받았던 ‘인형의 집’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 될 것을 암시하게 한다. 


라라인은 스펜서의 마음에 줄 그어진 미로들에 집중한다. 이를 위한 인물 활용이 눈에 띄는데, <스펜서>에는 등장인물이 적지 않지만 감독은 의도적으로 많은 인물을 정지해 있는 정물화처럼 처리했다. 실제 살아있는 사람들을 유령처럼 처리한 영화에서 인간적인 온기를 부여받은 건 흥미롭게도 ‘앤 불린’의 영혼과 들판에 선 ‘허수아비’다. 연휴 내내 다이애나는 앤 불린의 환영을 본다. 천 일 동안 왕비의 자리에 앉아있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생모인 앤 불린은 다이애나가 느끼는 또 다른 자아다. 허허벌판에 외롭게 서 있는 허수아비 역시 다이애나의 거울이다. 두터운 상징과 은유를 통해 영화는 효과적으로 다이애나의 내면을 투시한다. 

무엇보다 <스펜서>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영화다. 전 세계 소녀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후 여러 스캔들과 연기 논란을 거치며 추락하리라 의심받았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2014)를 거치며 세상 사람들의 안목과 예상을 거침없이 비웃더니, <퍼스널 쇼퍼>(2017)에 이르러 자신을 향한 세간의 편견을 부러뜨리고, 급기야 <스펜서>에 이르러 자기만의 연기 세계를 확고하게 다진다.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외형은 객관적으로 다이애나와 닮은 부분이 별로 없다. 그러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뉘앙스로 이를 이겨낸다. 눈치 보듯 주변을 살피는 몸짓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등의 생전 다이애나의 버릇을 예리하게 포착해 밀도 높게 체화해냈다. 시선의 감옥에 갇힌 다이애나의 모습에서 할리우드의 신데렐라로서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겪어 온, 그리고 앞으로 겪어 나갈 스타로서의 삶이 일견 겹치는 게 흥미롭기도 하다. 물론, 파파라치를 향해 “fuck you!”를 과감하게 날리는 이 여배우의 담력은 다이애나와 큰 차이를 보이지만 말이다. 여러모로, <스펜서>는 배우의 존재감이 극 전반에 새겨진 사례로 추가될 것이다.


<스펜서>에 대해 내가 가지는 유일한 의문이라면, 정보력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이다. 다이애나의 전사는 과감하게 생략하고 그녀가 겪었을 고통만을 상상으로 채운 영화엔 다분히 관객들이 그녀의 삶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리라는 계산이 깔린 것으로 보이는데, 어디 그런가. 다이애나가 세상을 떠 난지도 20년이 넘었다. 그녀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줄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뉴욕타임스는 다이애나에 대한 세대 간 인식 차가 크다고 보도하기도 했는데, 지금의 젊은 층은 그녀를 ‘국민의 왕세자비’로 받아들인 과거의 사람들과 다르다. 정보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하물며 영국이 아닌 나라에서 다이애나에 대해 지니는 정보란. 그녀에 대한 정보력에 따라 <스펜서>는 감상이 크게 갈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스펜서는 누군가에겐 불친절하게 다가갈 운명을 쥐고 있다.  


('데일리임팩트'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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