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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Mar 09. 2022

<더 배트맨> ‘미완’이라는 이름의 불완전성

1939년 태어나 팔순을 넘겼으나, 많은 창작자에 의해 다시 태어나며 영생의 길을 걷고 있는 DC코믹스 간판스타. 본명은 브루스 웨인이나 배트맨이란 이름으로 더 익숙한 고담 시티의 백만장자. 1989년 팀 버튼에 의해 흥행 보증 수표로 떠 오른 후 조엘 슈마허, 크리스토퍼 놀란, 잭 스나이더 등에 재해석 된 배트맨이 이번엔 맷 리브스에 의해 또 한 번 나이를 거꾸로 갱신했다.


다시 날아오른 배트맨의 가장 큰 족쇄는 내부에 있다. 너무나도 뛰어난 ‘배트맨 선배’가 있다는 것. 크리스토퍼 놀란 표 배트맨이 관객의 눈높이와 기대치를 겁나게 끌어올린 상황에서 메가폰을 쥔 맷 리브스는 온 세계가 팔짱 끼고 지켜보는 이 부담감을 어떻게 떨쳐낼 것인가. 


맷 리브스가 찾은 첫 번째 방안은 장르 혼용이다. “탐정 스토리처럼 <더 배트맨>을 기획했다”라는 맷 리브스의 부연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 영화의 노선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다. 캐릭터부터가 그렇다. <더 배트맨>에서 배트맨(로버트 패틴슨)은 히어로의 제스처보다는 추리소설에서 튀어나온 탐정처럼 도시를 누빈다. 망원경으로 타인의 집을 염탐하고 팔품 팔아가며 사건을 뒤쫓는 모습에선 잠복근무하는 형사의 이미지가 겹치기도 한다. 집에 돌아온 후에도 씻지 않은 몰골로 피곤에 절어하는 모습은 또 어찌나 애잔한지.

그런가 하면, 사건의 단서가 될 흔적을 하나둘 흘리며 추리를 종용하는 빌런 리들러(폴 다노)는 영락없이 필름누아르 <조디악> 속 살인마의 그것이다. 착각이 아니다. 맷 리브스는 <조디악> 킬러에서 리들러의 영감을 얻었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누아르에서 볼법한 형상으로 극에 앉아 있는 배트맨과 리들러를 둘러싼 ‘재개발’ ‘검찰 비리’ ‘마약 거래’ 이슈는 <더 배트맨>을 현실에 밀착한 탐정물처럼 보이게 하는 데 일조한다. 


맷 리브스가 기존 배트맨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신경 쓴 또 하나는, ‘미완’이라는 이름의 불완전성이다. 배트맨은 낮과 밤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분리해 내는 히어로지만, <더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은 아직 완벽하게 이를 통제하지 못한다. 박쥐 복장을 하고 자경단으로 활동한 지 이제 겨우 2년 차. 직장인으로 치면, 습득한 것보다 습득해야 할 것이 더 많은 미생인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근원과 밀접하게 맞닿는다는 점에서 영리하다. 잘 알다시피 배트맨은 어느 날 갑자기 전지전능한 초능력이 생긴 히어로가 아니다. 그에겐 자신의 힘을 옳은 일에 사용해야 할 의무가 없다. 그러라고 떠미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늘 ‘왜 굳이?’가 따라붙는다. 왜 굳이 사서 고생을? 무엇을 위해? 게다가 그는 늘 자문한다. ‘이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이 모든 의문을 뚫고 법의 규제 밖에서 자경단으로 활동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더 배트맨>은 ‘활동 2년 차’라는 설정을 통해 부모의 죽음을 동어 반복해서 그려낼 여지를 제거함과 동시에,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더 골몰할 수 있도록 판을 깐다. 


<더 배트맨>에 대한 만족도는 관객이 이 히어로물에서 무엇을 첫 번째로 보고 싶어 하느냐에 따라 갈릴 공산이 크다. 액션의 쾌감을 기대한다면 불만스러울 여지가 있다. 반면 배트맨 심리를 부각 시키는 드라마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나름 만족스럽게 여길 만하다. <더 배트맨>은 액션 시퀀스에서조차 시각적 카타르시스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보다 이 영화가 더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건 공포라는 분위기다. 

가령 배트카가 펭귄(콜린 파렐)을 추격하는 신에서 쫓고 쫓기는 과정의 구도보다 더 인상적인 건, 출발할 듯 말 듯 상대를 겁박하는 배트카의 거대한 엔진 소리다. 극 말미 배트맨이 악당과 엉겨 붙어 싸울 때에도, 배트맨의 주먹 끝에서 관객이 목도하게 되는 건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저렇게 두들겨 패도 되나 싶을 정도의) 극심한 분노다. (보다 못한 경찰들이 배트맨의 주먹을 뜯어말리는 지경까지 이르니 말 다 했다.) 이처럼 <더 배트맨>에서 액션은 너무 비현실적이지 않은 지점의 선을 지킨다.  


그리고 악당들이 있다. 무릇, 악당이 입체적일수록 드라마는 힘을 얻는 법이다. 역대, 배트맨 시리즈들은 이러한 악당 활용에 강한 면모를 보여왔다. <배트맨 2>(1992)에서 대니 드비토가 맡은 기이한 펭귄이나, <다크 나이트>에서 아론 에크하트가 놀랍도록 능숙하게 연기한 투 페이스도 있지만, 역시나 이 세계 최강은 조커라는 이름의 빌런이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으리라 여겨졌던 잭 니콜슨(<배트맨1>)의 조커를 히스 레저의 조커(<다크 나이트>가 위협하고, 히스 레저가 남긴 조커 신화에 호아킨 피닉스(<조커)>가 팽팽하게 대적하며 조커는 배트맨을 능가하는 존재감을 이 세계에 아로새겨 온 게 사실. 누가 또 이런 팽팽한 밀당을 성사시킬 수 있단 말인가. 당장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한가. 맷 리브스는 이 난제를 아예 조커를 지워버리는 방법으로 푼다. 리들러가 배트맨에게 던지는 ‘수수께끼’를 중심에 두고, 이 과정에서 배트맨이 마피아 두목 팔코네(존 터투로), 펭귄 등과 자연스럽게 만나도록 구도를 짰다.

예상대로 리들러와 팔코네와 펭귄의 존재감은 조커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크게 문제 삼을 생각은 없다. 말했듯,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여긴 부분이니까. 빌런 캐릭터의 장악력보다 지적하고 싶은 건, 이 모든 전략의 구심점에 있는 배트맨과 리들러의 ‘수수께끼’를 활용한 두뇌 게임의 느슨함이다. 수수께끼 문답 수준이 이렇다 할 임팩트를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리들러가 정답을 떠서 먹여주는 수준이라 추리의 재미가 충분히 쌓이지 않는달까. 


설령 이 수수께끼에서 맷 리스브가 노린 게 ‘추리로서의 재미’가 아니라 브루스 웨인의 ‘트라우마를 건드리기 위함’이라고 하더라도, 이 단점이 무마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감독 스스로가 ‘탐정 스토리’를 언급한 만큼, 이에 부합하는 추리의 긴장을 보여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The)’라는 정관사까지 붙여가며 배트맨에 더 주목하고 싶었던 감독 소기의 목적은 어긋나지 않는다. 자기 분열적인 카리스마로 무장한 팀 버튼의 마이클 키튼, 차가우면서도 신중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크리스천 베일에 이어 배트맨 슈트를 입은 뱀파이어 출신(<트와일라잇>) 로버트 패틴슨은 고독하면서도 퇴폐적이고 음울한 그만의 배트맨 캐릭터를 그려낸다. 이 캐릭터가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지 궁금하다. <더 배트맨>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그 궁금증만큼은 강하게 어필한 게 아닐까 싶다. 


('데일리임팩트'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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