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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Sep 21. 2022

<수리남> 윤종빈의 거절할 수 없는 제안

“믿기 힘들겠지만, 이 이야기는 전부 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들이다. 물론 듣고 나서 이게 진짜냐고 물어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접 듣고 판단하길 바란다.”      


<수리남> 1회 첫 장면에서 강인구(하정우)가 내뱉는 이 내레이션은 윤종빈 감독이 사건을 취재하며 느낀 소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한 줄 같다. 수리남이라는 남미 국가를 휘어잡은 대규모 마약 밀매 조직의 대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도 영화적인데, 그런 마약왕을 잡기 위해 위장 브로커 역할을 한 이도 ‘한국 민간인’이었다는 언빌리버블 한 이야기. “실화가 너무 영화 같아서 클리셰라고 할까 봐” 부러 “실화를 더 사실적으로 각색”했다는 감독의 후일담까지 알게 되면, 이야기 실제 주인공을 궁금해하지 않기란 힘들어진다.      


<수리남>은 남미에서 대규모 마약조직을 운영하다가 2009년 검거된 조봉행의 실화를 뼈대로 한 작품이다. 조봉행 범죄는 이미 한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조봉행은 ‘고액 알바’를 미끼로 코카인 유통에 평범한 주부나 대학생들을 활용했는데, 마약인 줄 모르고 물건을 운반하다가 타국 공항에서 적발돼 억울하게 옥살이한 이들이 속출했다. 이런 피해자 중 한 명인 정미정 씨 이야기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이 바로 전도연 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 그리고 당시 다른 수법으로 조봉행에게 당한 또 다른 피해자들 중 한 명인 K 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수리남>이다. 같은 시간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조행봉 유니버스’ 혹은 ‘스핀오프’처럼 보이기도 한다.      

국내에서 마약 범죄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배경 자체를 아예 마약 공급처인 남미로 한 사례는 <수리남>이 처음이다. 그렇다고 <나르코스> 류의 마약 카르텔 을 그린 미국 드라마들과 닮았냐고 하면 그것도 또 아니다. 영문 제목을 ‘나르코스 세인츠(Narcos-Saints)’ 박은 만큼 <수리남>을 넷플릭스의 <나르코스>와 연결 지어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나, <수리남>은 어디까지나 윤종빈의 자장 안에 있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K가장’의 욕망이 전면으로 나서면서 <수리남>은 마약 카르텔 영화의 틀에서 과함하고 기이하게 비껴나 ‘메이드 인 코리아’ 분위기를 입는다.     


드라마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아버지를 소개하는 인구의 내레이션으로 문을 연다. 요쿠르트를 배달하다가 뇌경색으로 사망한 어머니 죽음 앞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인구는 그런 아버지가 과로사하자,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남겨진 빛과 삶의 무게가 당장의 슬픔을 짓눌렀기 때문”임을.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된 인구에게 먹고 사니즘은 생존 그 자체. 결혼도 그 연장선에서 부랴부랴 해치운다.      

카센터와 단란주점을 오가며 나름 자리를 잡아가던 인구는 “내 아이들은 나처럼 살면 안 된다”라는 생각에 변화를 시도한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건 수리남. 통째로 버려지는 수리남의 홍어를 한국으로 수출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구는 수리남으로 향한다. 수리남 군인도 구워삶는 특유의 사업 수완으로 잘 뻗어나가던 홍어 사업은 그러나, 그의 앞에 한인 목사 전요한(황정민)이 등장하면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전요한으로 인해 졸지에 마약 사범으로 몰려 감옥에 간 인구는 전요한 검거에 도움을 주면 빼내 주겠다는 국정원 요원 최창호(박해수)의 ‘거절 할 수 없는 제안’을 받아든다.      


어떤 초기작은 감독 미래에 대한 예언이 된다. 단편영화 <남성의 증명>으로 주목받은 후 장편 데뷔작 <용서받지 못한 자>와 <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군도: 민란의 시대> <공작>에 이르기까지 윤종빈 감독의 작품들은 남성 생태계 안에서 그들의 의리와 위악들을 밀도감 있게 다뤄왔다. 이때 ‘두 개의 신분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 남자’들은 윤종빈 세계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인물군이었다.   

  

승영(서장원)의 친구이자 군대 선임으로서 <용서받지 못한 자> 태정(하정우)이 겪었던 혼란, <범죄와의 전쟁> 최익현(최민식)이 조폭도 아니고 일반인도 아닌 ‘반달’로 살아남기 위해 결탁한 처세술,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 서자 출신 조윤(강동원)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음에 느낀 애통함, <공작>의 박상영(황정민)이 간첩이자 사업가로 느꼈던 경계인의 마음까지 거칠게 말해 이들은 모두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던 남자들이었다.      

이러한 기조는 <수리남>으로 이어져 보다 다채로워졌다. 이 드라마에서 대부분의 인물들은 두 개의 세계에 걸쳐 있는 남자들. 감독 스스로가 ‘마피아 게임’이라고 설명했듯 저마다의 진실을 숨긴 캐릭터들이 아슬아슬한 역할극을 하는 과정에서 피어오르는 서스펜스가 <수리남>의 백미다. 입 하나 잘 못 눌렸다가는 바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인물들은 내가 살기 위해 상대를 교묘하게 이용하기도 하고, 거짓으로 깎아내리는 공작을 벌인다. 속고 속이는 게임,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심리전이 <수리남>의 공기를 팽팽하게 채우며 마지막까지 맹렬하게 달려 나간다.      


<수리남>은 단점이 없는 작품은 아니다. 2시간 남짓 한 시간 안에 신과 신, 쇼트와 쇼트 사이를 경제적으로 가로질러 왔던 윤종빈 감독 특유의 리듬감이 6부작 드라마로 늘어나면서 ‘쪼는 맛’이 줄어들었다. <수리남>을 보는 내내 ‘영화 버전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가정법이 떠오른 이유다. 시간을 더 확보한 결과물 치고는 선택과 집중에도 아쉬움이 남는다. 신도들 사연이 여러 번 언급되며 뭔가 보여줄 듯 말 듯 한 제스처를 취하다가 확실한 구두점을 찍지 않고 그냥 흘려버리는데, 조금 더 집요하게 다뤄졌더라면 전요한 캐릭터의 이중성은 물론 영화의 결이 보다 풍성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수리남>은 이러한 아쉬운 지점들을 상쇄시키며 돌파하는 강력한 장점들이 포진됐다. 일단 지루한 캐릭터가 없고, 연기 구멍도 없다. 데일 듯 뜨거운 황정민과 능청스럽고 유들유들한 하정우가 맞부딪히는 장면들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데 각기 다른 연기 스타일을 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이 드라마의 사건 자체이기도 한 전요한을 맡은 황정민은 장면 장면을 장악해 나가는 연기를한다. 그런 전요한의 의중을 거스르지 않는 동시에 환심도 사야 하는 인구를 맡은 하정우는 타이밍을 노리는 리액션과 추임새로 황정민이 조여 놓은 긴장을 풀어헤치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 ‘쪼임’과 ‘풀어내기’의 리듬이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뉘앙스가 매력적이다.   

    

특별 언급하고 싶은 배우는 조우진이다. OTT의 장점 중 하나가 원하는 신을 원 없이 돌려볼 수 있는 것일 텐데, 5회에서 조우진이 연기하는 ‘어떤’ 장면은 정말이지 여러 번 돌려봤을 정도로 임팩트도 있고 쾌감도 있고 놀라움도 있다. 어떤 캐릭터를 맡기든 기대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줘 온 배우이긴 하나, 최근 염정아와 함께 신선으로 분했던 <외계+인>도 그렇고 이번 <수리남>에서도 그렇고 ‘발견의 재미’를 매번 안기는 이 배우의 다음이 무척 궁금하다.      


<수리남>은 능숙한 장르 드라마다. 선 굵은 사건이 연이어 터지는 가운데에서도 유머가 살아 있으며, 시대의 공기 또한 극 전반에 두툼하게 담겨 있다. 윤종빈의 인장이 드라마라는 플랫폼 안에서도 죽지 않음을 증명하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최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한국 영화들이 여러모로 실망을 안긴 상황이기에 <수리남>이 보여준 한 방이 더 반갑게 다가오기도 한다. 


(SRT 매거진에 기고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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