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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Oct 24. 2022

<작은 아씨들> 정서경의 여자들

작가의 비전

<작은 아씨들>이 끝났다. tvN이 이 드라마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땐, 제목만 듣고 홈드라마를 상상했다. 개성 다른 자매들이 각자의 사랑을 찾아 나가는 로맨스물이라 생각했다. 드라마를 집필하는 이가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을 박찬욱 감독과 공동 작업한 정서경 작가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서경 작가가 언제 무색무취의 말랑말랑한 서사를 썼었던가. 정서경 작가는 과연 <작은 아씨들>을 어떤 장르로 분류해야 할지 망설이게 하는 드라마로 만들었다. 반전을 심고, 그 반전을 빠르게 박살 내고, 시청자 예상을 비틀어내며 전혀 다른 차원의 드라마를 투척했다.      


세상엔 무수히 많은 <작은 아씨들> 분신이 있다. 1868년 루이자 메이 올콧의 손에서 소설로 탄생한 후 다양한 분야에서 끊임없이 변주돼 온 ‘THE’ 클래식. 2020년 개봉했던 그레타 거윅의 영화 <작은 아씨들>은 같은 얘기라도 어떤 사상을 가진 창작자가 매만지느냐에 따라 완성도가 다를 수 있음을 증명하는 좋은 예였다. 그레타 거윅은 원작의 큰 틀은 훼손하지 않는 와중에 다소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결말을 수정하고 캐릭터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근사했다. 이런 멋진 변주가 또 나올 수 있을까?     

당분간 그레타 거윅의 <작은 아씨들>을 뛰어넘는 각색작은 나오지 못하리란 생각은 그러나 정서경의 <작은 아씨들>이 기분 좋게 배반했다. 동명 소설 속 자매들을 대한민국으로 끌어온 정서경 작가는 한발 더 나아갔다. “메그(오인주/김고은)의 현실감과 허영심, 조(오인경/남지현)의 정의감과 공명심, 에이미(오인혜/박지후)의 예술감각과 야심은 가난을 어떻게 뚫고, 어떻게 성장해 나갈까?”라는 궁금증을 달고 출발한 <작은 아씨들>은 성장물인 동시에 심리극이고 복수극이며 공포물이고 사회극이었다. 다양한 장르를 저글링하며 밀고 나가는 박력이라니.      


<작은 아씨들>이 방영 내내 관심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돈’이라는, 한국 사회를 뜨겁게 이간질시키는 화두를 날카롭게 다뤘다는 점이다. 즉 주인공들이 겪는 절박함과 지질함이 시청자에게 공유됐다. 정서경 작가는 루이지 메이 올컷의 주인공들이 겪었던 가난에 대한 애환을 대한민국에 사는 오 씨 자매들을 통해 보다 냉정하고 살벌하고 절절하게 제시했다.      


수학여행비도 못 낼 정도로 가난한 세 자매 앞에 700억 원이 뚝 떨어진다? 자칫 판타지로 보일 설정이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에선 그리 판타지도 아니다. 부동산 시세차익으로 불로소득의 꿈을 이뤄내는 ‘갓물주’와 ‘벼락거지’ 같은 신흥 계층이 공존하는 하수상한 세상. 노동의 가치가 도매가로 취급받는 사회에서 오 씨 자매들은 말한다. “무능한데 착한 부모가 어딨어? 무능한 거 자체가 나쁜 건데.” 가난에 대한 기형적 시선은 최근 한국 대중문화를 들썩이게 했던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의 문제의식과도 궤를 같이한다. <기생충>에서 부잣집에 기생했던 기택(송강호)네 식구들도 말했었다. “부자니까 착한 거야. 원래 잘사는 사람들이 구김살이 없어.”     

<작은 아씨들>은 미디어가 비틀어 놓은 여성 이미지를 재정립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오랜 시간 미디어가 다뤄온 여성은 주로 ‘근본이 착하고 선량한데, 주위의 질투로 오해와 설움을 받다가, 키다리 아저씨 같은 이성의 도움을 받아 다시 꽃길로 들어서는 ‘본투비 착한 여자’가 많았다. 여성의 야망은 잘못된 것인 양 왜곡되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심지어 그런 야망 품을 여성을 저격하고 낙인찍는 것도 여성으로 그려지곤 했다. 대표적인 ‘여적여’ 편견 조장.     


오 씨네 자매들은 다르다. 그녀들은 욕망한다. 부를 탐한다. 옳다고 여기는 것을 향해 불도저처럼 돌진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결핍을 인정할 줄 아는 기세 역시 장착했다. 세 자매뿐이 아니다. 복수를 위해 경찰도 언론도 따돌리며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진화영(추자현)과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더 많이 리스크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며 냉철한 투자를 해 온 고모할머니 오혜석(김미숙)은 어떠한가. 빌런 계에 새로운 결을 새겨 넣은 원상아(엄지원)도 두고두고 기억할만하다.      


완벽하지 않기에 성장할 수도 있고, 반대로 바닥에 코를 박기도 하는 움직이는 캐릭터들. <작은 아씨들> 캐릭터 DNA는 넓게 보면 정서경의 여자들과 공유된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희대의 명언과 함께 결코 친절하지 않음을 보여줬던 금자씨(<친절한 금자씨>), 남성 중심의 사회를 과감하게 깨부수고 나와 내달렸던 <아가씨>의 히데코(김민희), 모성에 대한 편견에 하이킥을 날렸던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 <헤어질 결심>의 서래(탕웨이) 역시 결핍을 뚫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지켜내려 한 여자였다.       

주지할 건, <작은 아씨들>이 여성 이야기를 하면서 남성들을 트로피로 세우진 않았다는 것이다. 남성들도 각자의 욕망을 위해 달리고,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그러니까 <작은 아씨들>은 성역할을 단순히 반전시킨 드라마가 아니라, 성역할의 고정관념을 지워나간 드라마라고 믿는다. 정서경 작가는 지난 9월 열린 ‘2022 벡델데이’ 행사에서 충무로에 작가가 사라진 현실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1역할, 제2역할, 제3역할, 제4역할까지 남자 배우다. 5번째, 6번째에서야 우리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여성 배우들이 제가 보기에 민망한 장면을 연기하러 나온다.” <작은 아씨들>에서 제1역할과 2역할을 하는 이들은 여성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망을 장면을 연기하러 나온 남자 배우는 없었다. 그저, 각자가 맡은 역할 안에서 기능하는 캐릭터들이 있었을 뿐.      


나는 늘 ‘영혼의 파트너’ 박찬욱 감독과 호흡하는 작가 정서경만큼이나, 박찬욱 아닌 감독과 호흡하는 정서경도 궁금했다. 몇 번 본 적이 있다. <비밀은 없다>는 박찬욱 없는 세계에서도 정서경의 이야기가 관습의 규칙을 과감하게 비껴갈 수 있음을 보여줬었는데, 물론 이는 자신의 세계가 확고한 ‘이경미 월드’의 인장이기도 했다. <독전>에선 조금 실망했던 것 같다. 작품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독전>은 정서경이 쓰지 않았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결과물이었다.      

김철규 PD와 함께 한 드라마 데뷔작 <마더>가 정서경 작가의 재능이 브라운관에서도 희귀할 수 있음을 확인시켜준 작품이었다면, <작은 아씨들>에서 정서경은 김희원 PD와의 찰진 호흡으로 영역 확장을 보여줬다. 아무리 좋은 각본도 이를 영상으로 옮기는 연출자의 치밀한 조율 없이는 빛을 볼 수 없다. <작은 아씨들>에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비전이 명확한 작가가 있었고, 그런 비전을 잘 이해하는 것을 넘어 속도감 있는 장면 설계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 PD가 있었다.      


<작은 아씨들>에는 정서경 작가의 인장이 아주 확실하게 박혀 있는 모멘트가 있다. 6화에 부친의 부동산 차명 재산 의혹 논란에 휩싸인 박재상(엄기준)이 ‘박재상재단 장학금 수혜자 명단’을 언론에 공개함으로써 위기를 타계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백재상 재단으로부터 수혜받은 ‘우주공학자 설민수’로 소개되는 사진 속 인물이 바로 정서경 작가. (류성희 미술감독은 ‘건축가 문도형’으로 등장한다). 그저, 재미(혹은 팬서비스)로 보고 넘길 수 있는 장면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작가를 향한 PD의 자부심과 애정을 느꼈다. 그것이 이 드라마를 만들어나간 사람들의 많은 걸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퍼스트룩' 매거진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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