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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Oct 27. 2022

<리멤버> 망각하지 말자는 방향성은 좋지만…

“왜 동지를 팔았나?”(안옥윤/전지현) 

“몰랐으니까! 해방될 줄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염석진/이정재)     


최동훈 감독의 영화 <암살>(2015)의 엔딩이다. 독립투사였던 염석진은 일제의 고문 속에서 살아남은 뒤 친일파로 변절한 ‘밀정’이었다. 독립군의 정보를 빼돌려 일본에 넘겼다. 동지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해방 후 경찰로 재직하며 호의호식했고, 친일 행적으로 반민특위에 고소됐을 땐 “내 몸속에 일본 놈들의 총알이 6개나 박혀 있다”라는 알리바이를 내세우며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았다.     


최동훈 감독은 무혐의로 재판장을 빠져나온 염석진에 분노하고 답답해하는 관객을 외면하지 않는다. 염석진의 오른팔이었으나 그에게 배신당했던 명우(허지원)와 안윤옥이 돌아와 염석진에게 총구를 겨눈다. 명우는 안윤옥을 통해 말한다. “16년 전 임무. 염석진이 밀정이면 죽여라. 지금 수행합니다.” “탕!” 염석진의 최후가 명징하게 다가온 건 그것이 단순히 관객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선택이 아니라, 법적으로 단죄하지 못한 친일 역사에 대한 화두를 던졌기 때문일 것이다. 

해방 직후, 친일파 척결에 대한 국민의 염원은 상당했다.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만들어졌고, 이를 시행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도 1948년 발족됐다. 문제는 이때 검거된 반민 행위자 688명 중 3분의 1 이상이 염석진처럼 거대 권력을 가진 경찰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무력을 이용해 자신들을 처벌하려는 반민특위를 공산주의자로 몰아갔고, 급기야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66사건)해 이들의 활동을 와해시켰다.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결과를 우린 알고 있다. 민족의 불운을 발판 삼아 부를 축적하고 권력을 쥔 괴물들. 그리고 윗대가 형성한 재산과 권력을 기반으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친일파 후손들. 그러니까 이 나라엔 처형되지 못한 수많은 염석진들이 있다. 개 중엔 친일 행적을 합리화하려는 이들도 있다. ‘일본 식민 지배 덕분에 한국이 발전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펴는 건 비단 일본 극우들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도 숨어있다. 참담한 역사는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이일형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리멤버>는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를 정조준한 영화다. 국가가 역사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할 때 개인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이다. 이 영화엔 원작이 있다. 홀로코스트에서 가족을 잃고 살아가던 80대 치매 노인이 가해자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여정을 떠나는 캐나다·독일 합작 영화 <리멤버: 기억의 살인자>(2015)다. 나치 설정이 친일파로 바뀐 게 가장 큰 차이. 리메이크 과정에서 영화는 20대 청년 인규(남주혁)를 주요 인물로 추가하며 또 한 번 원작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두 남자의 브로맨스를 곁들인 투톱 영화가 된 셈인데, 이것은 이일형 감독이 전작 <검사외전>(황정민 감동원 주연의 2015년 작) 에서 보여 준 전술이기도 하다.      

한필주(이성민)는 80대 알츠하이머 환자다. 그에겐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복수. 일제강점기 시절, 친일파들에게 목숨을 잃은 가족의 복수를 해야 한다. 무려 60년간 계획해 온 일이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필주는 오랜 시간 기다려온 복수를 감행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필주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친구가 된 20대 청년 인규에게 운전을 부탁한다. 단순한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고 운전대를 잡은 인규는 그러나, 필주의 살인을 목격하고 경악한다.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고, 필주는 과연 목표한 5명의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아쉽다. 과거사 청산과 사적 복수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싶은 마음과 상업영화로서의 흥행도 놓칠 수 없다는 조바심이 충돌하면서 어정쩡한 결과물이 됐다. 메시지 전달 면에서 <리멤버>는 이런 소재의 영화가 지양해야 하는 ‘안 좋은 패’만 연이어 보여준다. 먼저 필주와 인규를 제외한 캐릭터 대부분이 양식적이고 평면적으로 짜였다는 게 뼈아프다.       


그중에서 더 안 좋은 건 친일파 세력들인데, 이 영화에서 친일파들은 철저히 ‘악의 화신’으로 그려졌다. 그들의 후손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여서 ‘갑질’이 몸에 배었거나, 아랫사람 알기로 버러지처럼 하는 인간 말종으로 그려진다. 이것이 필주의 사적 복수에 당위성을 주려는 의도인 것은 알겠지만,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어디 그렇게 단순한가. 공식에 맞춰 찍어낸 듯 보이는 개성 없는 캐릭터로 인해, 배우들의 연기도 힘을 잃는다.      

게다가 <리멤버>는 메시지를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지 않고, 말로 구구절절 설명한다. 그러니까, 관객이 끓어오르기 전에 먼저 끓어오른다. 전형적인 인물들과 설명조 대사는 파괴력 있는 소재를 취한 장점을 스스로 깎아 먹는다. 이 영화가 마지막으로 총구를 들이대는 건 ‘방관자’이지만, 이러한 시도 역시 같은 이유로 별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편 오락영화로서의 <리멤버>는 허술하다. 60년간 사건을 계획한 필주가 기력이 쇠한 와중에 첩보원 뺨치는 실행력을 보여주는 건 ‘영화적 허용’이라 이해한다 치더라도, 의도하지 않게 사건에 동행하게 된 인규가 필주에게 동화돼 가는 과정에 쉬이 공감을 주지 못한다. 사건과 인물의 개연성이 아귀에 맞게 딱 떨어지기보다는, 갸우뚱하게 하는 허점을 여러 번 노출하며 긴장감을 놓친다. 카체이싱 액션을 가미한 만큼 속도감이라도 느껴져야 할 텐데, 그것이 영화가 품을 분위기와 섞이지 못하고 되려 방만한 느낌을 안기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이견 없이 좋은 평가를 받을 이는 이성민이다. 삶의 회한을 온몸으로 체화한 듯한 연기는 몇몇 단점을 지울 정도로 강력하다. 남주혁 또한 맡은 바 역할을 해내는 인상. 그러나 앞서 말했듯 캐릭터가 변해가는 과정이 다소 엉성한 탓에 배우의 연기도 밑지는 느낌이 있다.      

<리멤버>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친일 문제를 망각하지 않게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사실 그래서 아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조금 더 잘 만들어졌으면 좋지 않았을까. 이일형 감독은 제작보고회에서 “영화가 가진 메시지를 단순히 친일의 문제, 현재 사회에 남아있는 문제를 넘어서서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양한 측면을 고민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화두가 되려면, 영화가 먼저 짜임새 있는 만듦새를 갖춰야 했다. <리멤버>를 보고 가슴이 뜨거워질 수는 있다. 그러나 반문하게 된다. 그것이 과연 영화 자체의 힘에서 오는 것일까. 역사에 빚진 감정은 아닐까.        


+SRT매거진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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