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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Dec 02. 2022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다정함이 세상을 구하리

아마도, 세상에서 베이글을 가장 독창적으로 반죽한 영화일 것이다. 멀티버스 소재가 가 닿을 수 있는 영역이 아직 있음을 증명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2억 달러를 쏟아부어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를 만든 마블 제작진은 2500만 달러로 진정한 대혼돈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이 영화 앞에서 얼굴 붉히지 않았을까? 입소문을 타고 미국 내 상영관이 10개에서 3천 개로 늘어난 이변의 주인공, 미국 독립 예술영화 명가 A24의 흥행 역사를 바꾼 작품. 바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다. 그리고 액션, SF, 코미디, 어드벤처, 가족 드라마가 뒤섞인 황당무계 하면서도 눈물 질질 짜게 만드는 이 하이브리드 장르 영화의 중심에 양자경이 있다.      


주인공은 미국에서 남편 웨이먼드(조너선 케 콴)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중년의 중국 여자 에블린(양자경)이다. 그녀가 과거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 온 건 거창하게 아메리칸드림을 꿈꿔서가 아니었다. 그저, 사랑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결과는 지금 무엇인가. 소원해진 남편은 갑자기 이혼을 요구하고, 딸 조이(스테파니 수)는 동성애자라고 밝히면서 여자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온다. 미국으로 건너온 아버지 부양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탁소는 세무 조사로 위기일발이다.      

너덜너덜해진 인생의 벼랑 끝. 그때 남편 웨이먼드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한다. 자신을 다른 차원에서 온 웨이먼드라고 소개하더니 대뜸 하는 말. “악당 조부 투파키가 우주를 멸망시키려고 하는데,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당신뿐이야!”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그러나 이해를 구할 시간이 없다. 에블린은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 있는 또 다른 자신들, 그러니까 수많은 자신이 멀티버스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가령 이런 거다.


자, 당신은 지금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1. 대학 졸업 후 대학원을 간다. 혹은 2. 바로 취직을 한다. 1을 선택한다고 해서 2가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인생이 두 갈래로 나뉘어 따로 살아나간다. 이런 선택으로 인생은 가지를 치고, 또 가지를 친다. 시간이 흐를수록 1을 선택한 ‘나’와 2를 선택한 ‘나’의 인생은 완전히 벌어지고, 그 사이에서 가지를 쳐서 파생된 또 다른 ‘나’ 들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게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설정이고, 에블린이 처한 상황이다.      


영화는 에블린이 웨이먼드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실현됐을 수많은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에~’라는 가정법 안에서 쿵푸 마스터가 된 에블린, 철판 요리의 달인이 된 에블린, 세계적인 배우가 된 에블린, 피자 광고판을 능숙하게 휘두르는 에블린, 심지어 손가락이 소시지인 레즈비언 에블린이 튀어나온다. 이 영화가 여타의 다중 우중 소재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건 이 과정에서 비집고 나오는 ‘버스 점핑’이라는 설정에 있다. 버스 점핑은 다른 멀티버스에 존재하는 ‘나’의 능력치를 지금의 나에게 끌어올 수 있는 능력으로, 이 기술 응용력을 터득하면서 세탁소의 에블린은 다정한 에블린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따르는 질문. 수많은 사람 중에, 더 나아가 수많은 평행 우주 속 에블린 중에 왜 세탁소를 운영하는 에블린이 세상을 구할 구원자로 선택받은 것일까. 웨이먼드는 말한다. “당신은 이루지 못한 목표, 버린 꿈이 너무 많아. 당신은 우주 최악의 에블린이야.” 많은 기회를 놓쳐 버린 탓에 수많은 에블린 중 ‘최악의 에블린’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간절하게 품을 수 있다는 전언. 내가 불행할수록 다른 평행 우주의 나는 행복하다니, 이건 살신성인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세상이 빛이 되는 존재가 쫄쫄이 스판덱스 입고 초능력을 뽐내는 히어로가 아닌, 가장 보통의 존재 에블린이라는 사실이 묘한 위로를 안긴다.      


또 하나 눈여겨보게 되는 건 이 영화의 평행 우주 설정이 비단 에블린에 머물지 않고, 에블린을 연기한 양자경 인생으로 확장된 듯한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룡을 모델로 영화를 기획하다가 양자경으로 노선을 과감하게 변경한 대니얼 콴-대니얼 셰이너트 감독은 양자경 필모그래피를 다방면에서 녹여냈는데, 멀티버스 속 다양한 버전의 에블린을 통해 양자경은 그녀가 이제껏 걸어온 연기 인생을 터치해 나간다.      


아마, 홍콩 영화 최강의 액션 히로인 양자경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세탁소의 에블린이 자기 안의 액션 본능을 깨우치며 악당과 싸워나가는 모습에 짜릿함을 느낄 것이다. 영화는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 배우 에블린을 그리면서, 양자경이 레드 카펫에 섰던 실제 영상을 활용하기도 했다. 쿵푸와 마셜 아트, B급 코미디, 판타지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에블린을 보고 있자면, 이 영화는 양자경의 숨은 1인치까지 끄집어내 사용한 영화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양자경의 무수히 많은 선택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한다.      

1983년 미스 말레이시아로 선발되어 연예계에 들어선 양자경을 세상에 알린 건 액션 영화 <예스마담>이었고, 오랜 시간 양자경은 예스마담으로 불렸다. 시대 감각이 다소 떨어지는 제목이긴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성룡 버금가는 여성 액션 히어로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아시아권에서 매우 고무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97년 <007 네버 다이>에서 007 본드 걸로 발탁된 양자경은, 제임스 본드 못지않은 지략으로 본드 걸이 지니고 있던 어떠한 편견에 태클을 걸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선택. <미이라 3: 황제의 무덤>(2008) <더 레이디>(2012),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2016)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2018), <건파우더 밀크셰이크>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2021)로 이어진 활동은 견고한 대나무천장(Bamboo Ceiling)으로 가로막혔던 할리우드의 아시아인 편견을 넘어서려는 도전의 일환이었다. 무협 영화들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장르로의 험난한 여행을 떠난 것 역시 배우로서 자기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바람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첫 할리우드 단독 주연작이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내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건 의미심장하다. “동양계 이민자 여성이 슈퍼히어로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본 적 있나요?” 미국 엘르와의 인터뷰에서 양자경이 한 이 말에선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눈앞에 놓인 수많은 선택지에 과감하게 맞서 온 자의 자부심이 배어 나온다.      


우린 살면서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하고, 그것이 낳는 기회비용을 측정하고, 때로 후회를 하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 가장 나은가. 어떤 인생이 가장 훌륭한가. 그건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영역이다.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삶이 사실은 최악이 아닐 수도 있다. 최고의 에블린이 망쳐 놓은 세계를 다정함으로 수습하는 이가 최악의 에블린인 것처럼. 


('퍼스트룩' 매거진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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