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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Feb 18. 2023

[삶과문화] 관계의 재정립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휘몰아친 지난 3년간 서점가에서 ‘인간관계’ 관련 도서가 꾸준히 사랑받았다는 기사를 봤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를 외치던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 시대에는 고독을 위로하는 책들이 인기를 끌다가, 엔데믹(풍토병화) 시대에 들어 무례한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한 책들이 주목받고 있다는데, 혼자인 건 싫지만 혼자이고도 싶은 인간의 꺾이지 않는 마음이 읽히는 듯하다. 가까이하면 찔려서 아프고 멀리하면 외로운 고슴도치 딜레마 같달까.

그런데 이것은 일견 본능에 가깝다. 수십년에 걸쳐 인간 심리를 연구해 온 이들이 다다른 행복 1원칙의 결론이 ‘관계’인 걸 보면 말이다. 알다시피 팬데믹은 이를 거스를 방향으로 인간을 통제했다. 격리와 비대면으로 이어졌던 유례없는 사회적 고립 실험. 그러나 나는 이것이 인간관계에 어두운 면만을 가져왔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관계의 ‘양’보다 ‘질’을 조금 더 돌아보는 기회였기도 해서다. 내가 이 시기에 겪은 인간관계 중 가장 버라이어티했던 상대는 제주도에 있는 엄마다.


나의 서울 상경과 동시에 우린 오랜 시간 떨어져 살았다. 왕래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맞이한 팬데믹. 거리두기로 봉쇄된 서울이 답답해지자 나는 제주도를 오가기 시작했다. 한 번 가면 장시간 머무르다 보니 엄마와 준동거인 사이가 됐는데, 그 3년을 겪으며 알게 된 엄마의 모습은 40년 가까이 겪으며 알았던 엄마보다 더 다채로웠다.

내 기억 속 엄마는 여장부였다. 혼자 두 자식을 키우면서도 늘 강하고 꼿꼿했다. 나는 그게 그녀의 본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확인한 엄마는 여린 사람이었다. 나는 내 안에 입력돼 있던 엄마의 설정값과 차이가 나는 실제값 사이에서 흥미를 느끼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엄마 역시 자신의 예측에서 벗어나 있는 딸에게 적잖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렇게 우린 알던 관계를 다시 겪었고, 혈연적 관계의 사랑을 넘어 개별적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건 핏줄이라는 운명을 넘어서 재정립된 새로운 관계 설정이었다. 그 시간이 아니었다면 나는 평생 엄마라는 사람을 내 식대로 오해했을 것이다.

가족 이외의 관계 역시 이 시기 자연스럽게 재정립됐다. 강제로 진행된 인간관계 디톡스로 인해 만나는 사람 수가 줄었지만, 형식적으로 이뤄지던 만남도 줄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가까운 사람들이다. 집합금지명령이 떨어졌을 때, 가게들이 문을 닫았을 때, 마음을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친구들과 더 자주 연락하면서 마음을 나눴다. ‘행복학자’ 서은국 교수는 저서 ‘행복의 기원’에서 “친구가 무조건 많은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몇 명의 ‘진짜 친구’가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긍정적 정서를 안겨주는 친구들 덕분에 그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 관계의 너비가 줄어든 대신, 내 사람들과의 깊이는 한층 깊어진 것이다.

또 하나 재정립된 건 ‘나 자신과의 관계’다. 내 삶은 오래도록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었다. 내가 바라보는 나보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를 더 중요하게 여겼기에 일어난 일이다. 내 인생을 을(乙)로 만들었던 ‘셀프 디스’. 지금도 내가 판 함정에 논개처럼 뛰어들긴 하지만, 자책하거나 타인 눈치를 보는 습성이 이전보단 덜해졌다.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 내동댕이쳐져 있을 땐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한 발 떨어져 바라보니 감지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뒤늦게 터득한 것. 누군가가 나를 미워할 때 그것은 내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 내부의 문제일 때가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선상에서 이유 없이 누군가가 미워질 땐 그의 문제라기보다 내 안의 문제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미안한 감정이 들도록 나를 자꾸 몰아가는 사람에게 내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엔 ‘사과’ 외에 ‘적당한 거리두기’가 있다는 것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세계일보 삶과문화 지면에 쓴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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