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woorain Feb 24. 2023

왕관의 무게를 견뎌낸 여왕, 전도연

<일타스캔들> 사랑하라, 전도연처럼

세상엔 두 부류의 배우가 있다. ‘작품이 거듭될수록 전형적인 이미지에 포획되는 배우’와 ‘자기가 살아낸 작품 속 인물들만큼 스펙트럼이 넓어지는 배우’. 대다수가 전자의 늪에 빠진다. 소수 배우만이 후자를 살아간다. 전도연은 소수 중에서도 소수에 속하는 배우다. 그녀를 통과해 온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자. 여인2(수현), 희주, 홍연, 보라, 원주, 수진, 소라, 나영, 은하, 신애, 희수, 혜경…모두 전도연을 통과했지만, 모두 닮지 않았다. 그건 전도연의 연기 스타일이 캐릭터마다 달랐기 때문이고, 몇 마디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면모를 인물에 부여해왔기 때문이다. 인간 전도연의 개성은 ‘코 찡긋 미소’와 ‘특유의 콧소리’가 자동 연상될 만큼 확고하지만, 그것이 캐릭터엔 위협을 가하지 않는다는 점도 특기할 만한 지점이다.      


그런 전도연 연기의 중추를 이뤄온 건 ‘사랑’일 것이다. 주먹세계 보스(박신양)와 위험천만한 사랑에 뛰어들고 (<약속>),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시골 학교에 부임해 온 총각 선생님(이병헌)을 열렬히 사모하고 (<내 마음의 풍금>), 아이에게 수면제가 든 우유를 먹이면서까지 불륜이라는 위험한 열병에 빠져들고 (<해피엔드>), 난독증 있는 배우 지망생(조인성)을 스타로 만들기 위해 헌신을 다하고 (<별을 쏘다>), 차디찬 얼음물에 투신함으로써 천하의 바람둥이(배용준)를 철들게 하고 (<스캔들>),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겠다는 시골 총각(황정민)과 운명을 나누고 (<너는 내 운명>), 사랑 때문에 변두리 술집 마담으로 전락하고도 사랑을 하염없이 기다렸던(<무뢰한>). 사랑 때문에 울고, 사랑에 자신을 던지고, 사랑에 배신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헌신했던 전도연의 분신들.      

전도연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편견을 온몸으로 부수며 사랑을 향해 돌진해 왔다. 위험을 감수하며, 수동적인 애정을 거부하며. 그런 점에서 전도연이 <프라하의 연인> 이후 17년 만에 선택한 로맨틱 코미디 <일타 스캔들>의 남행선은 그녀의 이전 캐릭터들과 조금 다르다. 핸드볼 국가대표 출신 반찬가게 대표 남행선은 사고로 홀어머니를 잃고, 언니의 딸과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남동생까지 부양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전형적인 ‘캔디’ 캐릭터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연 1조 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수학 일타강사 최치열(정경호).      


일타 강사와 반찬가게 사장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가 두 남녀의 관계를 빌드업하는 과정은 익숙하다. 오해로 티격태격하던 남녀는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급기야 최치열은 행선 가족을 위해 반찬가게가 세 들어 있는 건물을 통째로 매입하고, 익명으로 에어컨을 선물하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지갑도 활짝 연다. 여기엔 섭식장애를 지닌 최치열이 남행선 음식을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한다는, 서로가 서로의 구원자가 된다는 밑그림이 더해지긴 하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일타 스캔들>은 영락없는 신데렐라 스토리다.      


‘백마 탄 왕자’의 구애를 적극적으로 받는 건 전도연 필모에서 낯설다. 남행선 캐릭터는 이 지점에서 조금 흥미로워진다. 수많은 멜로드라마에서 수없이 봐 온 빤한 캐릭터지만, 그런 캐릭터를 연기한 적 없는 전도연이 들어옴으로써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면이 있달까. 전도연 연기력이 상투적인 캐릭터를 현실에 발붙이는 안전핀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타 스캔들>에서의 전도연 연기가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엄청나다거나, 전도연 덕분에 이 드라마의 작품성이 껑충 뛰었다거나 하는 성찬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일타 스캔들>에는 전도연이, 전도연에겐 이 드라마가 필요했다는 생각은 회차가 진행될수록 짙어지는 중이다.     

<일타 스캔들>에 전도연이 필요한 이유를 증명하는 첫 번째는 정경호다.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배우들, 그러니까 송강호, 최민식, 한석규, 설경구, 이병헌, 황정민 모두와 멜로연기를 해본 유일무이한 배우인 전도연은 상대 배우의 기운에 따라 스스로의 연기를 능수능란하게 통제해 온 리액션의 고수다. 맹렬하게 싸워야 할 땐 강하게 밀어붙이고, 상대의 뉘앙스를 영리하게 이용해 존재감을 드러내 온 연기 백단. 남자 배우들이 전도연 앞에서는 긴장된다고 한목소리를 내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도연의 리액션은 후배 연기자들과의 호흡에서는 감싸 안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멋진 하루>에서 하정우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더욱 매력적이고, <무뢰한>에서 김남길의 연기가 더 깊어 보인 데에는 그들의 역량도 있었겠지만, 반대편에서 상대가 마음껏 뛰어놀 수 있도록 리시브한 전도연이 있었다. <일타 스캔들>의 전도연-정경호 ‘투 샷’에서도 이러한 면모가 엿보인다. 전도연은 욕심내며 나서지 않는다. 정경호가 자신의 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적정선에서 호흡을 건넨다. 최치열을 연기한 정경호의 존재감이 이전 작품에서보다 크게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대를 빛나게 함으로써 작품을 함께 빛나게 하는 것. 이것이 이 작품에서 전도연이 보여주고 있는 내공이다.      

그렇다면 <일타 스캔들>이 전도연에게도 필요했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작품이 ‘전도연 활용법’에 우물쭈물하는 감독들에게 하나의 힌트를 던져주고 있다는 확신에서다. 2007년 한국 배우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전도연은 그러한 왕관의 무게를 누구보다 잘 아는 동시에, 그 무게에 오랜 시간 맞서 온 배우다. 원래부터 연기 잘하기로 유명한 배우였지만, 칸에서 들어 올린 트로피는 그녀 앞에 예상치 못한 거대한 허들을 세웠기 때문이다. 세간의 시선이란 허들이다. 그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변했다. 전도연이 설마 로맨틱 코미디를 하겠어? 이 작품은 전도연에게 너무 가볍겠지? 창작자들은 ‘칸의 여왕’ 앞에서 스스로를 검열한 것이다.      


실제로 전도연은 칸의 여왕이라는 수식어를 받은 이후 영화인들이 자신을 조심스러워하고 부담스러워한다고 많은 인터뷰에서 밝혀왔다. 가볍고 재밌는 작품을 하고 싶은데 아무도 안 믿어 준다고 고백하기도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나온 <일타 스캔들>에서 전도연은 자신이 장르에 얼마나 열려 있는지, 배우로서 다양하게 쓰이길 얼마나 욕망하는지, 무엇보다 여전히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중이다. 그리고 우린, 1997년 <접속>을 통해 멜로 여신으로 등극한 배우가 2023년도에도 그 재능으로 사랑받는 모습을 목도하는 중이다. 엄청난 일이다. 


('퍼스트룩(1st Look)'에 쓴 칼럼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마블, 점점 더 멀어져 가네~ <앤트맨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