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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woorain Jul 24. 2023

<비밀의 언덕> 나의 솔직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된다면

검사받는 일기장에 내 솔직한 마음을 써 내릴 순 없었다. 학교에 제출하는 숙제용 일기와 별도로 혼자 보는 비밀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숙제용 일기장엔 개성은 없지만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이 나라 꿈나무 역할에 부합하는 형식적인 글들을 썼다. 반면 비밀 일기장에는 온갖 진실의 폭탄을 아낌없이 투하했다. 감추고 싶은 실수들, 나의 열등감과 피해의식, 누군가를 미워하는 뾰족한 마음…. 그 글을 누가 볼까 두려웠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일기장을 자물쇠가 있는 서랍 깊은 곳에 쑤셔 넣곤 했다.


지난 12일 개봉한 이지은 감독의 ‘비밀의 언덕’을 보면서 침전해 있던 그 시절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영화 주인공은 열두 살 소녀 명은(문승아). 명은은 자신이 젓갈 가게 딸이라는 사실이 마땅찮고, 교양 없는 부모가 부끄럽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한 명은은 결국 가정환경조사에서 부모의 직업을 얼렁뚱땅 지어낸다. 그렇게 시작된 거짓말은 거짓을 덮기 위해 점점 더 불어나고, 명은은 가짜 진실로 친구들의 인기도 얻는다. 아슬아슬하게 지탱돼 온 명은의 세계는 그러나, 전학생 혜진(장재희)의 등장과 함께 붕괴되기 시작한다. 계기는 ‘교내 평화 글짓기’ 대회. 통일전망대까지 발품 팔며 남북통일에 관해 쓴 명은의 교과서 같은 글은 우수상에 그치고, 불행한 가정환경을 솔직하게 글에 녹여 평화를 표현한 전학생 혜진에게 대상이 돌아간다.


약점이 될 수 있는 가정사를 의연하게 글로 써 내는 혜진의 행보는 명은의 마음에 큰 파동을 일으킨다. 명은은 자신의 비밀을 혜진의 글쓰기 방식에 대입해 본다. 시가 주최하는 글짓기 대회에 가족에 대해 느끼는 창피한 마음을 솔직하게 써서 응모한 것이다. 명은은 해당 글로 난생처음 대상 당선 소식을 듣는다. 그러나 대상 받은 작품 전문이 지역 신문에 공개된다는 사실에 명은은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거짓으로 꾸며 왔던 가정사가 탄로 난다는 근심이 하나. 또 하나는 바로 이것. “제 솔직한 마음 때문에 가족이 상처받을까 봐 겁나요.”


영화를 보고 나면 여러 질문이 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혜진처럼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 좋은가. 그러지 못한 명은의 글은 그래서 비겁한가. 어떤 글쓰기 방법이 좋은가. 얼핏 보면 혜진의 솔직한 글쓰기 방식이 더 멋있어 보이긴 한다. 실제로 많은 글쓰기 관련 책이나 강연에서 강조되는 게 ‘솔직함’이다. ‘진솔한 고백이 독자를 감동시킨다’, ‘자기 내면을 드러내는 게 용기다’ 같은. 물론, 이 말의 진짜 숨은 뜻은 자기만의 언어를 가지라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남용되면서 그 본래의 뜻이 퇴색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비밀의 언덕’의 미덕은 바로 여기, 솔직함이 용기이고 진리라는 빤한 결론에 이르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고백하자면, 칼럼에서 내 경험을 풀어낼 때 나는 여러 번 ‘자기 검열’을 한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부끄러워서? 없지 않다. 너무 사소해서 시시해 보이지 않을까란 우려 때문에? 역시 있다. 산문식 글을 쓰기엔 아직 경험과 공부가 덜 쌓였다는 의심도 크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그 경험에 얽혀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겪는 결정적인 깨달음은 대개 관계를 통해 오기에 타인이 글에 엮일 확률이 큰데 그랬을 때, 필터 없는 내 글로 인해 그 누군가가 상처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어떤 마음은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나를 객관화하는 계기가 되지만, 내 안에서 충분히 여물지 않은 어떤 상처는 털어놓음으로써 도리어 덧나기도 한다. 자기 안의 진실을 감당해 내는 능력도 사람마다 다른 만큼, 글 쓰는 방식도 화해 방식도 같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상을 포기하고 비밀을 언덕에 묻기로 한 명은의 선택을 지지한다. 그것이 최선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언어가 지니는 무게’를 알게 된 자의 선택이니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명은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세계일보 쓴 [삶과문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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