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5
공연 날. 음주가무에서 유일하게 연이 없어 늘 아쉽던 '무'에 도전했던 결실을 무대로서 맺는 날 아침. 오늘이 아니면 결코 입지 않을 쌧파란 원피스를 입기 위해 2년을 줄곧 잘 써오던 눈썹칼을 들어 다리에 댔다. 하지만 2년의 세월은 연약한 피부로 칼날마저 녹이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고, 그렇게 칼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공연이니까, 조금 더 완벽한 모습을 위해 새 눈썹칼을 꺼내, 신나게 밀어재꼈다. 그러다 무릎 근처에 울퉁불퉁 솟은 털구멍을 네댓 개 밀어버린 것이다. 제모에 혈안이 되어서였는지 아픈 것도 딱히 느끼지 않았는데, 붉은 피는 멈추지 않고 뚝뚝 흘러내리기까지 했다. 순간적으로 '피가 멈추지 않는 그런 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그런 병에 걸린 것인가?' 하고 불안해졌지만 현재 우선순위는 공연 준비이니 미뤄뒀다. 그래도 상처니까 물로 씻기라도 할까, 하여 샤워기 물에 대는 순간 강력한 고통을 통해서 이것이 생각보다 깊게 베인 상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가 멈추지 않아서, 그리고 아파서 밴드를 찾아 붙였다. 하얀색 패드가 가운데 정사각형으로 박혀있는 방수 밴드. 결점 없이 멋지길 바랐던 무대에서 2cm*2cm짜리 하얀 정사각형 조각이 붙은 내 무릎으로 공연해야 한다는 게, 내 상처를 덮어 둔 이 임시방편을 보여야 한다는 게, 내 상처가 보여지는 게, 아니 어쩌면 내가 상처가 있다는 게 지독히 싫었다. 의식됐다. 친구들이 온다고 했고, 사진도 찍어줄 건데 이렇게 튀어버리는 밴드를 붙인 채로 박제되어야 하다니. 오랜 시간 열심히 연습했건만 눈에 틔는 무릎을 의식하는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모든 것을 망칠 것만 같았다. 공연 직전에 밴드를 떼어버릴까? 조금 더 피부에 맞는 색의 밴드를 사 올까? 온갖 솔루션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렇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상처를 가리려고 노력한들 나를 이미 '상처 입은 존재'라고 의식해 버린 이상 어떤 조치도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상처는 그냥 상처일 뿐인데. 조금 더 만족스러운 모습을 위해서 무언가를 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그저 운 안 좋게 입은 상처일 뿐인데. 스쳐 지나가는 작은 상처가 존재 자체가 된다. 그게 더 큰 아픔이다.
무릎의 손톱만 한 '결점'을 씻어 낼 수 있는 아주 유일한 방법. 그냥 별 게 아니라고 여기는 거다. 상처 입은 것도 까먹은 채 하던걸 하면 된다. 하고자 했던 것을 계획대로 하며 된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지났다. 종일 찍힌 수많은 사진들을 보고 나서야 하루종일 내 무릎에 작은 상처를 달고 다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문득 생각났다. 피부색과 일치하는 듀오덤이 이미 집에 있었지! 진작 붙일걸!... '무대에서 무결한 모습으로 보였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아니었다. '이걸 붙였다면 내 상처가, 내 아픔이 조금 더 수월하고 흉터 없이 아물었을 텐데..'
복선 없이 날아오는 요즘의 상처들에 대처하는 태도로 확장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