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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xsoul Oct 21. 2023

영수증과 마지막 강의

영수증 (20231021)

 어서 오세요 오랜만입니다. 요즘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죠? 오늘 가족 돌봄 이슈가 있어서 조금 늦는다고 한 김 군을 제외하고 모두 참석하셨네요. 난방을 조금 해 놓아서 많이들 건조하실 텐데요, 앞에 비치된 핸드크림부터 바르시죠. 그렇죠? 향이 아주 좋답니다. 특히 항균 물질인 트리클로산, 트리클로카반과 아르간 오일이 함유되어 있어서 보습 효과도 뛰어나답니다. 한분도 빠짐없이 바르시면 좋겠습니다. 모두 발라주셔서 이곳이 그 핸드크림 향으로 모두 가득 차면 기분이 아주 좋아질 것 같습니다.  자, 그럼 시간을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바로 시작해 볼까요.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고 오늘이 우리가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될 테니까요. 

   오늘 입장 티켓을 대한 영수증을 모두 받으셨을 텐데요, 역시나 오늘도 강의가 끝날 때까지 제 눈에 잘 보이도록 손에 영수증을 꼭 쥐고 있어 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애착인형처럼요. 하하. 모든 메모장 반입을 금지했을 텐데요, 여러분 만약 필기가 필요하시다면 영수증 위에 해 주세요. 외부로 노출되면 안 되는 귀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우리 강의는 절대 비밀리에 진행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그렇기를 바라실 거고요. 그렇죠?

   제가 매 시간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꾸준히 실천하신 분이 계신가요? 아, 생각보다 많은 분이 실천하진 않으셨군요. 이해합니다. 마늘 두 알, 양파 반쪽, 생강 한 알, 두부 반 모, 토마토 반 개, 커피콩 두 알, 와인 반 컵을 매일같이 갈아서 드시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을 것이니까요. 이 마법주스를 꾸준히 실천하신 분이 세 분이나 계시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진정성 있게 듣고 실천하신 저 세분께 박수를 한번 보내겠습니다. 

  이제까지 아주 기나긴 시간 동안 저희는 '삶의 원리'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시간이니만큼 오늘은 그 반대인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반대의 요소를 알아야 본질을 꿰뚫을 수 있으니까요. 아주 중요하고 유익한 시간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특히 오늘 내용을 잘 들으시면, 여러분들이 훗날 눈을 감는 그 순간 왜 죽음이 내 앞에 닥치게 되었는지 깨우칠 수 있는 거대한 죽음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게 되실 겁니다. 자, 오늘은 '비스페놀 A'에 대해서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역시나 처음 들으시는 표정이군요. 어려운 전문용어가 나와서 반감이 드는 것도 이해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반경에서는 전혀 들을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비스페놀 A는 친유성화학물질(Fat-liking chemicals)은 그러니까 지방을 좋아하는 물질입니다. 지방 조직, 즉 체지방 내 축적될 수 있죠. 암발생과의 연관성도 아주 높다고 합니다. 고위험성우려물질(SVHC)로 분류되며, 내분비장애물질, 생식독성물질 등 불명예스러운 명칭은 다 갖다 붙여집니다. 신경증, 당뇨병, 유방암, 전립선암, 정자수 감소, 조숙증, 비만을 일으키죠. 어때요, 듣기만 해도 어마무시하지 않나요? 그래서 제가 재차 강조드린 그 마법주스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이미 비스페놀 A를 상상 이상으로 많이 축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네, 질문이 있으신가 보네요. 그런 어마무시한 비스페놀 A는 어디에서 주로 노출되냐는 질문을 주셨네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비스페놀 A는 우리 생활의 모든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안경, 물병, 식품 캔, 수도관 등 그 사용처도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은 감열지로 만들어진 영수증인데요, 용매가 되는 물질이 영수증에 묻을 때, 그러니까 트리클로산, 트리클로카반 등 물질이 닿을 때 비스페놀 A는 더욱 잘 용해되어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들 사용하는 핸드크림이 이 용매로 제격이죠. 맞아요. 오늘 사용한 그 핸드크림 말입니다. 

아, 맞습니다. 예리하시네요. 여러분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영수증 또한 비스페놀 함량이 높은 감열지로 만들어졌지요.

 저 뒤에는  갑자기 왜 이렇게 소란스러우신가요? 아, 윤 양이 갑자기 쓰러졌다고요? 괜찮습니다. 여러분 너무 소란 피우지 마시고 제 자리로 다시 착석해 주세요. 윤 양의 저런 행동은 전혀 놀랍지 않으니까요. 윤 양은 현재까지 비스페놀 A 노출 함량 350mg이 넘었습니다. 여러분이 궁금해하시니 어쩔 수 없이 스포를 하자면, 이번에 저희 소속 연구단은 생명에 지장을 주는 비스페놀 최대 허용치가 체중 1 kg당 6mg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곧 발표를 앞둔 상황이고요. 이에 따르면 체중이 55인 윤 양의 최대허용치는 330mg이지만 이미 윤 양은 20mg을 초과해 버렸습니다. 어제까지 윤 양의 수치가 320 mg이었으니 오늘 꽤 많은 노출로 인해 체내 함량이 허용치 이상으로 축적되었을 것으로 보여지네요. 

윤 양은 저희 연구단의 예상을 아주 잘 뒷받침하는 사례가 되겠군요. 사실, 올해 3월 유럽 사법재판소는 비스페놀 A를 고위험 우려 물질로 인정하고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아니죠. 비스페놀에 대한 경각심이 현저하게 덜한 사회적 분위기 덕분에 이번 저희 연구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죠. 한국의 일반 슈퍼마트에서 사용하는 보통의 영수증은 유럽 안전 기준인 200ppm의 50배에 달했으니까요. 연구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사이에 벌써 많은 분들이 정신을 놓으셨군요. 저희 연구단의 가설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기분이 매우 좋네요.

마침 오늘 늦게 참석하신다는 김 군이 들어오고 있네요. 이번 모집단의 마지막 샘플이 될 김 군. 앞의 강의 내용을 놓쳐서 아쉽군요.

안녕하세요 김 군 오랜만입니다. 자, 그럼 강의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기반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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