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 (20231007)
10년을 함께한 친구가 떠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간 희로애락을 같이 한 친구였다. 수년간의 외국 생활도 함께 했다. 나의 모든 것까지는 아니지만 아마 대부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어떤 비밀스러운 나의 기록들도 다 알고 품어줬을 것이다. 하지만 인사도 없이 한순간 떠났다. 아니 어느 순간 떠나 있었다. 처음에 아무런 응답이 없을 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잠수겠거니 했지만, 여전히 왜 그랬는지 도통 영문을 모른 채로 그는 그렇게 나에게서부터 사라졌다.
정말로 이대로 이렇게 끝인 걸까. 그를 잘 알고 있다는 나름 전문가를 수소문해서 찾았고, 그는 사실상 떠난 것으로 종결지었다. 과거의 그로 되돌릴 방법이야 있겠지만 그것은 나에게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게 할 뿐이니 그냥 이쯤에서 놓아주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착잡한 심정이었지만, 나에게는 애도할 시간 따위 없었다. 이직을 염두에 두고 있는 회사 쪽에서 '당장 면접을 진행할 테니 준비를 하라'는 공문을 날렸기 때문이다. 나는 10년지기를 떠나보내며 충분히 애도하기도 전에 다음 새로운 친구가 필요하다. 그렇다. 나는 당장 다음 노트북이 필요하다. 근데, 뭘로 사지?
네이버를 먼저 켠다. 맥북 가격.부터 검색한다.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M1, M2, 8G, 16G, CPU, GPU 등등. 분명 나는 영어를 할 줄 아는데, 모르겠다. 한국어를 알지만 한국어로 된 불경을 읽으면 이런 느낌일까. 유튜브 그다음으로 켠다. 맥북 추천. 무엇 무엇은 절대 사지 말라는 영상과 무엇은 고민할 시간은 구매만 늦출 뿐이니 당장 사라는 영상 무더기가 공존한다. 성실히 본다. 그래도 모르겠다. 리뷰어, 일반인, 공학자, 과학자, 포토그래퍼, 작곡가의 광범위한 직업군상의 인간들을 열심히 만나 그들의 의견을 모조리 숙제처럼 열심히 감상한다. 내가 선택해야 할 카테고리가 좁혀졌다. 맥북 모델, 리퍼제품 유무, 반도체 칩 버전, 램 용량, 색상, 추가로 아직 학생인 친구에게 아이디를 빌려 학생할인으로 구매할 것인가의 유무. 앞으로의 10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여정을 또 함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대로 후회할 선택을 하면 안 된다는 강박의 감정이 슬슬 수면 위로 드러난다. 선택지별로 가격은 참 다르다. 비싸다. 제일 싼 것도 비싸다. 리퍼로 구매할 수 있지만 선택지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노트북으로 일하는 것도 아닌 난데, 애초에 노트북을 만질 시간자체도 없고 막상 해봤자 웹서핑, 영상 보기, 문서작업 정도인 난데, 역시 제일 싼 걸 선택해야 하나. 아니다. 나는 연륜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게 아니다. 연륜의 지혜는 싸기 때문에 선택해서 결국엔 두배로 낭비를 했던 숱한 경험들의 장면을 내 머릿속에서 되감기 해준다. 그래. 비싼 걸 사는 게 미래를 위한 투자일 수 있어. 테이블을 만들어 각 선택지별로 가격을 적어본다. 최종 후보는 네 개 정도로 추려졌지만 다들 쟁쟁하기 때문에 하루종일 고민을 하다가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다. 나에게 즐거움을 줄, 나에게 후회를 안겨주지 않을 친구는 누구란 말이냐. 스트레스를 받아서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그렇게 장장 다섯 시간 동안 침대에 누워서 최종후보 사양 한 개를 남겼다. 하지만 다 골라도 색깔의 선택지가 남아있다. 색깔은 가격의 영역이 아니다. 실버, 스페이스크레이, 미드나이트 전부 같은 모델이라면 색상에 상관없이 가격은 같다. 이것은 오히려 더 어려운 선택지다. 내가 10년 동안 봐도 기분이 좋을 색은 무엇인가. 갑자기 맥북의 색깔이 나의 앞으로 남은 인생의 정서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만 같다. 내가 특정한 색깔과 궁합이 엄청 맞지 않아서 볼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져서 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볼 때마다 내 기분이 좋아지는 색깔을 고른다면 나는 그 긍정적 정서로 인해 세상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미드나이트의 검은색은 너무 장난감 같을 것 같고, 스페이스그레이가 새로운 색상이라는데 벌써 이미 너무 흔할 것 같고, 역시 클래식은 영원하지. 음악과 책도 클래식을 주로 선택하는 나는 실버로 마음을 굳힌다. 그렇게 결심을 했다. 하지만 또 하나의 관문. 공식 홈페이지에서 제일 빠른 수령일은 4일 후. 그럴 수야 있겠다만, 매장도 가깝고 기왕 결심한 김에 더 빨리 받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렇게 또 이런저런 사이트를 기웃거리다가 쿠팡으로 나는 인도받은 것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싼 가격과 하루 만에 배송을 해준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그리고 불변의 가격을 보이는 공식 홈페이지와는 다르게 수요와 공급법칙에 따라 같은 모델도 다른 가격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올블랙에 가까운 미드나이트 색상이 그토록 인기가 없었던지 여타 모델 대비 20만 원이 저렴한 것이다. 누가 채갈까 조바심을 내며 고민도 없이 미드나이트 그 맥북을 로켓배송시켜 버린 것이다. 맥북의 색상으로 느낄 미래의 내 정서 따위는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내 품으로 온 미드나이트 M2 맥북에어는 너무나 만족스럽다. 그 만족스러움으로 깨달았다. 나는 색상에 대한 취향이 없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후회를 원하지 않는 자, 취향을 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