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민 Aug 09. 2020

<애드 아스트라>

분노와 집착이 아닌 의지(依支)의 미덕

영화가 시작되자 자신의 심리 상태를 보고하는 로이 맥브라이드(브래드 피트)의 모습이 나온다. 그는 화면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임무에만 집중하고 나머진 전부 잊을 겁니다. 딴 데 눈을 돌리거나 중요하지 않은 일에 연연하지 않을 겁니다.” 로이가 그 말을 하는 와중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서 떠나가는 장면이 교차된다. 어렸을 때부터 우주비행사가 되길 바랐다는 그는 항상 임무를 수행하는 데 천착하며 주변에 시선을 주지 않는 사람이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국제 우주 안테나의 출구를 향하는 로이는 다음과 같이 독백한다. “난 항상 남의 시선으로 날 봐. 의식적으로 웃고 연기를 해. 하지만 눈은 늘 출구를 바라보지. 날 건드리지 마.” <애드 아스트라>의 오프닝 시퀀스는 그 자체가 로이의 심리 보고서다. 그는 “임무에만 집중”하느라 아내를 떠나보낸 사람이며, 사람들을 대면할 때 진심으로 소통하기보단 원만한 생활을 위한 연기를 한다. 그는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이를 증명하듯 출구를 나서 우주에서 작업을 하는 로이는 “여기 있으면 평화롭다.”고 읊조린다. 자신을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인간들이 우주에는 없기 때문일 테다. 로이의 얼굴에는 희로애락이 보이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조차 그의 얼굴과 목소리는 흐트러지지 않는다. 바로 다음 시퀀스에서 그의 상관은 로이가 항상, 심지어 사고를 당할 때도 심박수가 80을 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오프닝 시퀀스가 제시하는 바는 명확하다. 첫째, 로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 둘째, 로이가 임무에 집중하느라 타인과 융화하지 못한다는 것. 이것은 영화 전반에서 강조되고 타개되어가는 문제의식이다. <애드 아스트라>는 로이가 감정을 회복하는 여정을 그린다. 이 영화는 죽은 듯이 살던 사람이 삶을 살게 되는 영화다. 그렇다면 로이는 어떻게 이 여정을 통해 유의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가. 그 복잡한 과정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 원인을 짚고 갈 필요가 있다. 


원인에 대한 단서는 기나긴 과정을 거쳐 하나씩 드러난다. 첫번째 단서는 로이가 우주 한복판에서 구조 작업을 수행하다가 분노에 찬 유인원를 맞닥뜨렸을 때 나온다. 유인원을 본 로이는 심리 보고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유인원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어요. 나는 그 분노가 이해돼요. 아버지에게서도 그 분노를 봤죠. 내 안에도 그 분노가 있어요. 아버지가 떠나서 화가 나요.” 유인원과 아버지, 그리고 로이는 모두 분노를 품고 있다. 전반부에 묘사되는 유인원과 아버지의 얼굴은 분노의 표상이다. 그들의 이미지는 강렬하다. 대사 한 마디 없이도 관객에게 전해야 할 모든 감정을 전할 수 있을 정도다. 동료들을 모두 죽였다고 말하며 카메라를 노려보는 아버지의 표정, 괴성을 지르는 유인원의 섬뜩한 얼굴. 분노 그 자체를 표현하는 이미지. 그런데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표현된 분노가 로이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로이의 둔감함과 분노의 관련성은 그의 다음 대사에서 드러난다. 심리보고를 하면서 유인원에 대한 인상을 말한 로이는 그 다음에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 분노의 껍질을 들춰보면 그 안에는 오직 상처뿐이에요. 고통이 가득해요.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던 것 같아요.” 이 대사는 로이와 아버지, 유인원이 보여왔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로이는 임무를 제외하면 어떤 것에도 무덤덤해 보이는 사람이다. 냉철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그의 모습은 달에서 화성까지 가는 길에 출현한 그 어떤 인물보다도 듬직하다. 로이가 영상 속에서 보아온 아버지는 지적 생명체를 찾겠다는 야망과 확신으로 가득하다. 그의 당당한 풍채가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로이가 말하는 상처와 연이 없어 보인다. 짧은 시간 등장했지만 어마어마한 공포를 조성한 유인원의 모습에서도 상처 입은 가련한 동물은 떠오르지 않는다. 이들의 겉모습과 속이 다르다는 사실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로이는 시종 배타적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상처를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가 본래 느껴야 할 절망과 고통이 아닌 분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임무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한 로이의 배타적인 태도는 그의 진면모가 아니라 일종의 생존전략이다. “고통이 가득해요. 그래서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어요”라는 로이의 말은 이렇게 바꿔서 말해도 지장이 없을 것이다. “분노한 채 지내지 않고는 고통을 버틸 수가 없었어요.” 요컨대 로이는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분노로 다른 감정을 틀어막고 있는 상태다. 여기서 로이의 상태에 대한 식견을 보충해줄 두번째 단서를 말하려고 한다. 나는 앞서 로이가 “아버지가 떠나서 화가 나요.”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짚었었다. 로이의 상처는 떠나간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전반부 내내 그 사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두번째 단서는 로이가 화성에 도착해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로이는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심박수가 80을 넘는다. 이때 로이가 아버지에게 전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아버지. 보고 싶어요.” 아버지에게 메시지를 전하러 가면서도 계속 회의하고, 자신이 왜 화성으로 가고 있는지 확실히 말하지 못하던 그가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내 마음을 모르겠다. 아버지를 찾고 싶은 건지 그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건지.”) 이 장면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상처를 직면한다. 그러니 그가 이 장면에서부터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오프닝에서 제시된 로이의 첫번째 문제점은 로이가 상처로부터 눈을 돌리는 과정에서 파생된 폐단이다. 그는 상처를 느끼는 대신 분노를 품었다. 


상처를 직면하게 된 시점부터 아버지를 찾아가는 로이의 여정은 필연적인 느낌을 준다. 전반부의 로이는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별수 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듯이 보였지만 화성에서는 아버지를 찾으려는 로이의 의지가 굳건해지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로이는 사실 능동적으로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조직 상부에서 아버지에게 전할 말을 미리 써둔 대본을 읽은 후에 “저 사람들은 나를 이용하고 있어.”라고 독백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로이가 달에서 화성을 거쳐 해왕성에 갈 때 타는 우주선의 이름이 ‘세피우스’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세피우스는 신화에서 포세이돈의 분노를 풀기 위해 자신의 딸 안드로메다를 제물로 바쳤던 왕의 이름이다. 그리고 해왕성의 영어 이름 naptune은 포세이돈에서 따온 이름이다. 전반부에서 로이는 포세이돈의 분노(해왕성에서 발생한 서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세피우스가 바치는 제물이었다. 화성을 향한 여정의 주체는 로이가 아니라 세피우스였다. 하지만 화성에서부터는 이 상황이 역전된다. 로이는 아버지를 찾겠다는 주체적인 목적의식을 품은 채 스스로 우주선에 탄다. 우주선에 타기 위해 밧줄을 잡고 하수구를 통과하는 로이는 “내가 곧 당신일까요? 똑같은 어둠 속으로 끌려 내려가고 있는?”이라고 말한다. 이 장면의 시각적 구성은 정말 탁월하다. 물속은 어두워서 로이의 주변을 제외하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밧줄을 잡고 가는 로이는 말 그대로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듯 보인다. 이 구도는 후반부에 해왕성에 남으려는 아버지를 향해 밧줄을 잡고 가는 로이의 이미지를 통해 반복된다. 이 숏은 서사적 맥락을 떼어놓고 한 폭의 그림으로 보아도 성립이 된다.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인간, 혹은 그냥 어딘가로 ‘끌려가는’ 인간의 이미지라 봐도 좋겠다. 제임스 그레이는 숏을 통해 감각을 효과적으로 전하는 법을 아는 감독이다. 그런데 로이가 아버지를 향해 가는 운명론적 이미지는 서사적으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내가 곧 당신일까요?”라는 대사가 모든 걸 설명한다. 로이는 아버지와 닮았다. 둘은 우주비행사이며, 임무에만 집중하고 타인에게 늘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로이에게 아버지를 향하는 여정은 곧 자신을 향하는 여정이다.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것은 서사적으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해소하는 행위이며 상징적으로는 또 다른 자신을 구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로이는 이끌리듯 아버지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마침내 해왕성에 도착하여 아버지를 만났을 때 아버지는 우리가 전반부에 영상에서 본 것처럼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영화에는 그 이유가 명확하게 나와있지 않다. 아마도 해왕성에 찾아온 사람이 자신을 향해 “보고 싶어요”라고 말했던 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행동거지는 하나하나가 가련하다. 왜소한 체구와 벌벌 떠는 몸짓이 관객에게 유약한 인상을 준다. 그가 “난 아내에게도 너에게도 관심이 없다.”라고 말을 하는 와중에도 강직한 대사와 달리 그의 시선은 머물 곳 없이 흔들린다. 로이가 “알아요 아빠. 그래도 아빠를 사랑해요.”라고 대답하자 그 말을 듣고 움찔거리는 아버지의 리액션 숏이 나온다. 이 행동거지는 로이가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원인에 대한 세번째 단서다. 로이의 아버지는 정말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를 찾기만 하면 아들과 아내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인가. 그의 입은 그렇게 말하지만 그의 몸짓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의 몸짓은 그가 “분노의 껍질을 들춰보면 그 안에는 상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껏 드러낸다. 동시에 그의 몸짓은 그가 지적 생명체를 찾겠다는 사명감이 아니면 삶을 버틸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로이와 아버지는 그래서 임무에만 집중하고 타인과 융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로이가 아버지에게 지구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자 아버지는 “나를 실패자로 만들지 마라”라며 간청한다. 로이는 그 말에 “아버지는 실패하지 않았어요. 이제 우리의 희망은 우리 둘뿐이에요.”라고 응답한다. 로이의 대답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지구로 돌아가는 길에 밧줄을 끊고 해왕성에 남기로 결정한다. 로이는 머릿속으로 아버지에게 닿지 못할 질문을 던진다. “왜 포기하질 못하세요?” 그때 그 질문에 대답하듯 로이의 시점 숏이 스크린을 채운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광활한 우주와 그 한가운데 있는 아름다운 파란빛이다. 하지만 로이는 빛으로부터 시선을 돌려 집에 돌아가는 데 쓸 방패를 마련해줄 우주선을 바라본다. 로이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우주 대신 지구를 선택했다. 


방패를 뜯어내 세피우스로 향하며 로이는 생각한다. “아버지는 멀고 낯선 세계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기록했다. 그 세계는 아름답고 장엄했다. 하지만 그 멋진 겉모습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랑도 미움도, 빛도 어둠도. 그는 없는 것만 찾았고 눈앞에 있는 건 보지 못했다.” 이 대사에는 자신의 미래였을 아버지를 목도한 후 로이가 깨달은 바가 녹아있다. 삶에 원대한 의미나 사명이 없더라도 괜찮다. 희망은 아름답고 장엄한 것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충실하게 지탱하는 것은 꼬박꼬박 돈을 모아 산 캐비아가 아니라 매일 같이 먹는 밥과 김치다. 아내와 이별할 때 로이는 숭고한 임무를 위해서라면 사생활은 통째로 바쳐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숭고한 것을 위해 소소한 것을 포기한다면 평소엔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지탱해 줄 것인가. 우리는 원대한 꿈과 거창한 뜻을 동경하지만 사실 작은 것들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깨달음은 간단하지만 깨달음을 얻기까지 내면의 여정은 더없이 입체적인 영화. <애드 아스트라>는 숭고한 것에 대한 집착과 가장된 감정이 삶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지와 대사의 복합적인 관계를 통해 묘사한 걸작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벌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