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반지와 꽃시계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과 모아둔 비자금을 과감히 투자하여 딸과 유럽여행을 떠났다. 아직 학생인 딸이 비행기 예약이며 숙소 등 일정을 짰다. 난 비용을 담당했다. 지루했던 일상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2주간의 긴 여행을 떠났다.
역사유적지를 찾아가고 손에 꼽는 박물관과 예술품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보아서인지 처음에 왔던 깊은 감동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중에는 어디를 갔다 왔다는 기록이 없는 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물론 감상도 흥미도 호기심도 깡그리 무너져 버렸다. 게다가 따듯해야 봄 날씨가 이상 기온으로 너무 추웠고 너무 많이 걸어서 발바닥과 무릎이 쑤셔 내렸다.
언제 다시 갈지 모르는 여행이기에 본전을 채워야 된다는 욕심에 일정이 빡세었다. 그 일정은 나를 위한 딸의 배려였기에 진통 약까지 털어 넣으며 열심히 소화시키려 애를 썼다. 여행의 빡빡한 일정이 너무 힘들어 어느 날은 하루 일정을 중도에 그만두고 풀밭에 앉아서 클로버 꽃으로 꽃반지랑 꽃시계를 만들면서 놀았다. 그때 풀밭에 물기가 옷에 베일까 봐 신발 한쪽을 벗어서 깔고 앉아 쪼이던 햇빛과 풀냄새가 지금도 어렴풋이 생각난다.
풀밭에 앉아 있으니 어린 시절 장난감이 거의 없어서 자연 속에 있는 풀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 났다. 주위에 마침 네 잎 클로버가 많이 있었다. 네 잎 클로버 찾기를 하다가 클로버 꽃을 줄기 채 꺾어 꽃반지를 만들어 딸에게 주었다. 딸은 그 즉석 꽃반지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즐거워하는 딸을 보니 덩달아 나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좋았다. 덤으로 꽃시계도 만들어 주었다. 꽃 왕관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참았다. 꽃 왕관을 만들려면 많은 꽃이 필요한데 주위에 클로버 꽃을 다 꺾으면 다른 관광객에게 민폐일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하루를 외국의 낯선 풀밭에서 봄 햇빛을 받으며 앉아 쉬고 나니 기운이 났다. 여행을 온 의미가 되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저녁에는 마트에 가서 과일이랑 치즈랑 물이랑 와인을 샀다. 간단하게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베란다 벤치에 앉아 저녁노을을 보며 와인을 비우니 피로가 풀렸다.
그다음 날부터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내며 여행을 마치고 무사히 내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여행 중 찍은 사진이며 쓴 글들을 나중에 정리해야지 하면서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한 두 해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여행 갔다 왔다는 기억만 있을 뿐 구체적이 것들이 희미해질 무렵 산책을 나왔다가 클로버 꽃잎을 보니 그때 여행 가서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추억들보다 유독 마음이 가득 실려있던 꽃반지 추억이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여행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