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관찰자에게
얼마 전,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의 각 파트 말미에는 철학적 질문이 주어지는데, 해체주의와 그 해체주의를 연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를 다룬 파트에서 흥미로운 질문을 발견했다.
'동성애는 오랫동안 정신병으로 여겨져 왔다. 나아가 동성애는 심각한 범죄로 처벌받기도 했다. 성에 대한 사랑은 정상이었고, 동성에 대한 사랑은 이상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문화권에서 동성애는 성적 취향의 문제로 여겨질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 아닌 다른 무엇에 절절하게 사랑을 느끼는 경우는 어떤가? 스마트폰을 인간보다 더 사랑한다면? 이 경우를 이상하다고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을 보고 BBC드라마 'Years and Years'의 베서니(Bethany)라는 캐릭터가 떠올랐다. 베서니는 극 중 그녀의 부모님에게 'I'm a trance'라는 대사를 통해 본인의 정체성을 밝히지만, 그녀의 부모는 베서니가 '트랜스젠더'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베서니는 본인이 '트랜스젠더'가 아닌, 인간의 신체에서 벗어나 그녀의 '뇌 속 데이터'를 다운로드 한 후, 클라우드에서 데이터로서 평생을 살아가고 싶은 '트랜스휴먼'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그녀가 트랜스젠더라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는 부모였고, '섹슈얼'과 '젠더'의 차이에 대해서도 이해하는 부모였지만 '트랜스 휴먼'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는 없어 베서니에게 인터넷을 금지한다는 말을 던지며 하나의 시퀀스가 마무리된다.
베서니가 스마트폰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며 본인의 신체에 휴대폰을 삽입하고 ('임플란트'하고), 뇌 안에 초소형 칩을 삽입하는 인터랙션 노드와 같은 수술을 받기까지 한다. 그녀는 스스로가 컴퓨터화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그 순간부터 모두의 자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머리에 있는 칩이 신경 경로의 활동과
망막의 미세 운동을 포착해서
내 생각을 추측해
"우리가 방금 얘기하는 동안
난 80일 동안 내린 비에 대해 생각했어
어디서 왔고, 왜 내렸고
다음엔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바로 30초 전엔
위성 데이터에 접속했어
엘니뇨 동선을 볼 수 있거든
대서양에 있는 기압 센서도 확인할 수 있고
항해 중인 선박이 측정한 기압 수치를 볼 수도 있어
이 모든 정보를 한곳에 두면
난 그곳에 있는 거야
저 안에 있는 것 같아
조류와 바다의 깊이, 파도의 물결
다 내 안에 느껴져
...
이 모든 걸 합치면 기쁨이 돼
내 머릿속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
베서니는 인터랙션 노드를 통해 눈을 깜박이는 것만으로도 사진을 찍고 연락처 내의 사람들의 위치를 추적할 수도 있었다.
스마트 시티 사업이 본격화되며 정부가 국민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훗날 작품 속의 인터랙션 노드와 같은 시스템이 보편화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를 감시하게 될까? 그렇다면 서로의 추적은 진정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점뿐만 아니라 인간이 진정 사이보그화되거나 트랜스휴먼으로서 데이터로만 남을 수 있냐는 문제는 사회적 윤리적 문제와도 직결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신체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각자 다르다. 수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스스로를 냉동인간으로 보관하기도 하지 않는가.
개인의 결정으로, 혹은 개인의 취향으로 그런 실험을 진행하거나 신체 개조를 하는 것에 무조건 비난을 할 수는 없다. 비용적 부담이든 신체적 부담이든 모든 부담은 결국 개인의 몫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아직, 확실히 부담스럽다. 실제로 베서니가 등장하는 장면을 모아놓은 클립의 댓글에는 베서니가 미쳤다는 반응을 주로 볼 수 있기도 하고 이런 인간의 존재가 인류에게 위협이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그 또한 반갑지 않은 일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 또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의견일 뿐이다.
다너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에 따르면 해러웨이는 페미니즘이 테크노포비아를 극복하고 과학기술에 의한 이질적인 사이보그를 수용할 때 페미니즘은 저항과 결속의 신화를 창출해낼 수 있을 것으로 파악한다. 물론 이 선언문은 '페미니즘 이론'의 고전 중 하나이며 인터랙션 노드나 트랜스 휴먼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와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해러웨이의 주장을 응용해본다면 시대가 변하면서 패러다임이 바뀌고 우리의 인식이나 상식이 새로운 변곡점을 맞이할 때, 우리에게 과거의 일들은 하나의 지식으로 남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인간과 기계가 혼융된 비인간의 인간, 즉 사이보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인터렉션 노드나 트랜스휴먼을 받아들이는 것도 당연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눈을 들어 우리의 현재를 보는 미래의 관찰자는 우리가 고민하는 이 질문의 답을 어떤 방향이든 사회적인 틀에서 손쉽게 정의내릴 수 있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또한 우리는 그 관찰자가 과거와 현재의 고민이 모여 만들어지는 개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참고)
1. 우리가 매혹된 사상들 (안광복)
2. 이론/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1980년대에 있어서 과학,
테크놀로지,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 (다너 해러웨이, 임옥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