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저를 비롯해서 전업주부의 고단함 또는 노동의 가치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분석하거나 평가해보려는 시도가 많았습니다.
뭔가 24시간 365일 휴일, 휴식 없이 일한다, 가사일이 많다.. 이런 접근법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었는데요.
산업사회 이전에 비해 분명히 기계의 도움을 많이 받는 것도 사실이고, 가족구성원 수도 줄어들어 물리적 노동양이 줄어들었음이 마땅함에도 주부들의 정서적인 고단함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기에, 그 문제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이 늘 남아 있었습니다.
전업맘 생활 8년차에 접어들어 슬슬 이런 정리를 해봅니다.
전업맘은 '롤'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
전업맘이 루틴하게 하는 일상노동도 노동이지만 최근 복잡해진 사회에서는 담당하고 있는 역할이 많아졌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후 수족노동이 확 줄어듬과 동시에, 발발이 해야 될 일들이 늘어나서 뭔가 이상하다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던 찰나, 아이 학원을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저희 동네 경비실에 앉아 계시는 경비원 아저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래. 경비원 아저씨와 내 처지가 꼭 같구나.
하루 종일 대기하고 있다가 민원이 들어오거나 비상시적인 일이 발생하면 '언제나 대처'해야 하는 롤.
그래서 어디 멀리 가지 못하고 경비실에 앉아 계시는 것을 노동의 가치로 인정받고 계시는 분들.
1) 대기와 대처
이 것이 경비원 아저씨를 비롯한 다양한 유사 근무자들의 롤이 아닐까 싶습니다.
2) 경영관리
이 것은 집사의 롤입니다. 가정경제의 생산과 소비, 투자 등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며 운영하는 일을 담당합니다. 집안의 인테리어, 살림살이 설계와 유지 보수 등의 일을 담당합니다. 실제 필드에서는 '유지보수'라는 업무영역이 존재하고 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달에도 유지보수 비용을 에이전시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계약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족구성원 개개인의 행정처리, 가정자산을 유지보수하는 일, 새로 매입하고 판매하는 일 등등 다양한 일들이 포함됩니다.
3) 매니지먼트
요즘 엄마들은 아이의 전담매니저입니다. 아이의 일일 스케줄과 영양, 건강, 학습, 취미, 놀이, 생활, 교우과계까지 매니징하죠. 모두 정신노동+일부 육체노동의 영역입니다. 단순 매니저라기보다 매니지먼트 회사의 업에 더 가깝습니다.
4) 시터
우리가 시터를 고용할 때 그들에게 아이의 학습까지 강요하진 못합니다. 단순히 애와 놀아주고 시간을 같이 보내주는 댓가로 비용을 지불합니다. 시터의 롤은 단순히 '있어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요리를 하거나 영양설계를 하거나, 운동계획을 세우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전업맘들은 시터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5) 튜터
공부시켜야죠. 학원에 다 내맡긴다 하더라도 일부는 '봐줘야 하는 영역'을 봐주고 있습니다. 숙제를 봐주건 숙제를 도와주건 직접 끼고 앉아 가르치건 아이의 공부진도를 끌고 가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6) 그리고 남는 가사도우미
혹자는 전업맘, 전업주부의 롤을 가사일이 전부인 것처럼 매도하지만 가사일은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 육체노동 영역임과 동시에 전체 업무영역 중에서는 가장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입니다. 안 할 수 없어 겨우 이어가는 노동이지만 그렇게 대단히 내 정체성을 지배하는 성격의 것도 아닙니다.
가사노동을 제대로 잘하기 위해서 전업주부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거나, 집안 경영(살림)을 똑부러지게 하고 싶을 때 선택한 전업주부의 일상에서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성격의 것이 가사노동일 뿐이라고 생각되거든요. 뭔가 잔업같은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저는 본업인 위의 5가지 '일처리'들을 할 때에 비해 가사노동을 할 때에는 잔업하는 느낌같은 묘한 불쾌한 기분을 느낍니다. 게중에서 가장 창조적인 활동인 요리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정체성이나 끝장나는 보람이나 부가가치적인 활동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에 참 지지리도 떨쳐버리고 싶은 성격의 것이 바로 가사노동인 것 같습니다. 그놈의 요리라는 것도 가족구성원 서너명 말고는 소비자도 딱히 없어서 실력을 더 키워봤자 갖다 쓸 데도 없습니다. 요리블로거를 하거나 나중에 식당을 차리지 않는 한요.
전업주부니까 가사노동을 중요시하고 잘 하려고 노력해야 되는건데, 늘 왜 이놈의 가사일이 싫을까에 대한 의문이 8년 내내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전업주부는 가사노동을 잘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사노동까지 같이 처리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가사일은 전업주부의 존재의 이유가 아니라, 무보수 잔업일 뿐이며, 실은 가정의 행정적인 면, 경영적인 면, 관리적인 면의 롤을 전담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 집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더 중하고 메인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면서요.
가사일만 쳐내면 나머지 롤은 가족구성원 중 다른 사람들이 나눠서 하거나, 아예 사회에서 담당하던 것들이 가정 내로 들어오면서 전업맘의 역할, 즉 롤이 많아졌습니다. 롤이 많아졌다는 것은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실제로 움직이고 일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요.
이러나저러나 노동량 총량의 법칙이랄지, 물리적 노동이 줄어들면 정신노동이 늘어나고, 예비노동까지 더해지면서 가슴에 묵직한 것이 계속 자리하고 있네요. 사람의 삶이란 정말 신기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