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갖춰 보이는 나이든 여성이 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가 서있는 그 공간은 그녀의 재력을 말해주고 있지만 또한 그녀의 외로움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살고 있지만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는 삶, 모든 것들을 다 갖추고 있지만 죽고 싶은 삶, 그런 삶을 나이 들어 살게 된다면 결국 나 또한 주인공처럼 죽음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추석연휴가 그랬던 것 같다.
가족도 벗도 없는 빈 공간, 할일은 많지만 하기 싫은 무기력한 공간, 어떠한 소리도 없는 그 공간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공간을 달리하면 나아질 거라 여겨 여기저기를 휘젓고 다녔지만 결국 내가 마주한 것은 외로움이었다.
입에 거미줄이 쳐지는 느낌이랄까?
마음에도 여기저기 부정적인 거미줄들이 쳐져 나는 거기에 딱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벌레 같았다. 처음으로 느끼는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영화 중간쯤 가다보면 주인공 해리엇이 인디 애호가들을 위한 인디음악방송 'KOXA' 에서
아래와 같은 DJ멘트를 날린다.
“ 좋은 날이 아니라 의미 있는 날을 보내세요.
진실 되고 솔직한 하루를 보내세요.
정직한 하루를요.
그저 좋기 만한 날이라면 나중엔 비참해질 거예요.
집안일을 하거나 숙제를 하면서
운전을 하거나 놀면서 회사 일을 하면서요.
뭔가 의미 있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보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좋기 만한 날이 아니라고 말한다.
진실 되고 솔직한 하루라고 했다.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날이다. 마음을 나누고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삶의 의미는 그러한 관계 안에 있다.
해리엇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잠재적 가치를 드러내며 삶을 완벽하게 살아냈다.
젊어서는 유리천장을 극복하고 롤러광고기획을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광고회사로 키워냈고, 나이가 들어서는 정원사보다 가정관리사보다 미용사보다 더 완벽하게 그들의 일을 해내는 여전히 능력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하물며 가족조차도 그녀를 싫어했다. 그녀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숨만 쉬며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우연찮게 신문의 사망기사를 읽게 되면서, 본인의 완벽한 사망기사를 준비하기 위해 사망기사 전문기자인 ‘앤’을 고용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지난 삶이 완벽했음을, 잘 살아왔음을 얘기해주는 사망기사를 원했다. 하지만 앤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의 가족, 동료, 주변인들까지 다 만나보지만 그녀의 까칠한 성격 탓에 그녀가 원하는 내용의 사망기사를 쓰지 못하게 된다.
결국 그녀는 본인의 완벽한 사망기사를 쓰기 위해 앤에게 도와줄 것을 제안한다.
" 하나, 고인은 가족들의 사랑을 받아
둘, 고인은 동료들의 칭찬을 받고
셋, 고인은 아주 우연히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끼치지
네 번째는 자신만의 와일드카드가 있어야 해.
내 와일드카드가 뭔지 모르겠어.
그 답을 찾는 걸 도와줘야겠어. “
문득 나의 와일드카드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나는 현재 어떤 사람인가?
과거에는 어떤 사람이었나?
주인공처럼 질문을 던져보지만 나 또한 잘 모르겠다.
우린 어쩌면 그저 좋기 만한 날들을 위해, 의미 없는 날들임을 알면서도 우리의 삶을 흘러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와일드카드 따윈 생각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영화는 이제 그 답을 찾기 위해 해리엇이 어떻게 그녀의 인생을 바꾸지는, 앤은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 대한 원망을 버리고, 수필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변화되는지, 그리고 말썽쟁이 ‘브렌다’를 포함한 그들 셋의 우정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앤’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 대한 원망으로 늘 과거에 머물러 있다.
“ 이건 소녀의 판타지야
넌 다 큰 성인이야
난 네가 현실을 썼으면 좋겠어. “
영화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갈 때쯤 해리엇은 앤의 글에 대해 진실 되고 솔직하게 얘기한다.
나 또한 그랬다. 엄마가 떠난 후 피터팬을 그렇게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드는 것이 싫었다.
과거의 그 순수함에 머물며 조각나있는 좋았던 기억들을 끄집어내며 살았다.
두려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나의 삶을 산다는 것이.
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리움조차도.
실수를 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네가 실수를 만드는 게 아니야
실수가 널 만들지
실수는 널 더 똑똑하게 하고
널 더 강하게 하고
널 더 자립적으로 만들어
내 딸한테 절대 못할 얘기 하나 해줄게
어마어마하게 실패해
실패해야 배울 수 있어
실패해야 사는 거야
‘실패가 나를 만든다.’ 는 문장이 가슴에 와 닿았다.
나의 삶 또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모든 것들이 새로워서 실패했고, 모든 것들이 익숙해져서 실패했다.
아프고 아팠다. 며칠 동안 밤잠을 설치고 몇 달 동안 가슴 아픈 적도 있지만
그 경험들은 결국 내가 삶을 살아가는데 많은 것들을 알게 해주었다.
그 실패들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앤에 대한 해리엇의 진심이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런 어른을 만나고 싶었다.
경험을 통해 깨우침을 얻고, 진심을 담아 그 깨우침을 얘기해줄 수 있는 어른.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은 어른.
자신의 잠재력을 드러내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해보라고 격려해주는 어른.
결국 해리엇은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서 즐거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앤은 진짜 해리엇의 사망기사를 쓰게 된다. 하지만 앤은 해리엇의 장례식 때 공들여 쓴 사망기사를 읽지 않는다. 대신 그녀에게 해리엇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얘기한다.
해리엇은 절대 잊혀 지지 않을 거예요.
해리엇 롤러는 자신만의 삶을 살았고
저도 그 뜻을 기려 저만의 삶을 찾을 것입니다
결국 앤이 해리엇의 와일드카드를 찾았다.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만의 삶을 살았던 해리엇 롤러.
내가 죽기 전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