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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Nov 30. 2024

완벽한 남편의 집안 점령기

아침, 출근 준비를 하던 중 남편이 갑자기 "같이 나가자"라고 했다. "뭐 하러?"라고 물었더니, 그는 담배를 사러 가는 길에 나를 배웅해 주겠다고 한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출근하는 사람들 몇 명이 타고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남편의 모습은 너무나도 완벽했다.

남편의 머리는 마치 새집을 짓기 직전의 모습 같고, 하의는 무릎이 툭 튀어나온 회색 추리닝, 신발은 어디서든 신고 다니는 크록스였다. 왼손은 무심하게 추리닝 주머니에 찔러 넣었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쥐포였다. 쥐포를 간간히 씹으며 나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날씨 춥나? 아침 운동할 때 모자 써야겠더라." 엘리베이터 안에 쥐포 냄새가 퍼졌지만, 그는 여전히 말을 이어갔다.

"응"이라고 짧게 대답하고 사람들이 다 내린 후, 나는 그에게 한마디 했다. "당신은 완벽해." 그러자 남편이 물었다. "뭐가?" "완벽한 백수라고."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백수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남편

남편은 백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해 가고 있다. 집에서도 그의 생활 영역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원래 모든 공간은 나의 영역이었고, TV 앞 거실 소파만이 그의 구역이었다. 그런데 백수 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이제 대부분의 공간이 그의 차지가 되었다.

서재방은 그의 주식 공부방이 되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 두 대와 스마트폰을 이용해 시황 분석을 하고 있다. 작은 방은 그의 골프 연습장으로 변했다. 퍼팅 연습 매트를 깔아놓고 홀인 연습을 하더니, 최근에는 숏게임 연습장까지 만들었다. 각종 골프 용품들로 그 방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베란다는 이제 낚시 도구 전시장이 되었다. 골프 전에는 낚시가 그의 주요 취미였고, 직장을 그만두고 나서는 골프와 낚시 두 가지 취미를 동시에 즐기고 있다. 온갖 낚시 도구들이 베란다를 가득 채우고 있다.

TV가 있는 거실은 본래 그의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내가 거의 그곳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소파 전체를 차지해 누워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내가 엉덩이 하나 걸칠 공간도 없다.

부엌, 현관, 안방까지 그의 차지

부엌도 나의 영역에서 점점 밀려났다. 남편은 요리에 취미를 붙였고, 그로 인해 살림살이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에겐 필요 없던 건조기, 야채 탈수기, 진공 포장기, 두유기까지 구입하며 주방은 이제 그의 도구들로 가득 차 있다. 현관에는 수시로 오는 택배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집 안 구석구석이 남편의 물건으로 가득 차 있는 상황이다.

안방만큼은 나만의 공간일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든 벌컥벌컥 열고 들어와 안방 화장실에 주기적인 '영역 표시'를 하고 있다. 나의 출근 준비 시간에 맞춰 들어와 볼일을 보고 가는 남편 덕에, 아침마다 화장대 앞이 향기로운 냄새로 그득하다.

나만의 공간의 중요성

이제 나는 점점 더 나만의 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서로 각자의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되, 서로 간섭하지 않기로 한 요즘의 남편과 나의 모토는 '따로 또 같이'이다. 나의 공간은 줄어들었지만, 그 덕분에 내가 해야 할 일도 줄어들어 한편으로는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앞으로도 서로의 공간과 역할을 존중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남편은 지금도 거실에서 쥐포를 뜯으며 소파와 한 몸이 되어 TV와 노트북과 휴대폰 3중 방송을 즐기고 있다.
과거, 회사에서 뼈를 갈아 넣는 각오로 완벽한 직장생활을 했던 남편처럼, 이제는 '완벽한 백수 생활'도 응원하며 우리는 각자의 삶을 이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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