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로 받은 2년.
휴학하고 모은 아르바이트비를 탈탈 털어 갔던 유럽여행의 출발일은 내 생일이었다. 한참 비행기를 타고 내렸는데 시차로 인해 또 10월 21일, 생일이었다. 두 번의 생일을 맞이하고 두 배의 축하를 받았다.
이번에는 만나이 제도의 도입으로 두 번째 서른을 맞이했다.
첫 번째 서른(예전 한국나이)을 맞이했을 때 할 줄 아는 건 글쓰기와 타인의 말 경청하기가 다였고, 가진 건 가난과 많은 생각뿐이었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인생이 답답했는지 여러 가지 일을 저질렀다.
몇 번 좌절됐던 대학원에 입학했고 직장을 다니면서 주말에는 직업훈련교사 자격증 취득을 위한 연수를 들었다. 연수를 듣기 전 주말에는 상담센터에서 초보미술치료사로 아동을 만났다. 열심히 살다가 서른다섯에 가정을 이루겠다고 떠들고 다니면서 1인 가구의 삶을 위해 차곡차곡 연금 계좌에 돈을 넣는 모순성도 발휘했다. 재테크 한다고 투자도 열심히 했다....돈 공부한 기록은 짬짬이 블로그에 끄적거렸다.
힘들어 죽겠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시간의 빈틈을 여러 가지 일로 채워 넣었다. 왜 많은 걸 한꺼번에 했을까? 생각해보니 사회생활 경력이 꽤 쌓인 서른의 내 일상이 눈에 훤~히 보일만큼 반복적이어서였다.
오늘도 내일도 비슷한 하루.
반복되는 일상이 가끔 다행이다 싶다가도 인생이 이래도 되는 걸까? 자아성찰 하던 나는 가만히 흘러가다 고여 버린 인생에 심심함을 느꼈던 거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저지른 모든 짓은 반드시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걸.
주말에 비록 1~2케이스였지만 초보미술치료사로 아동을 만났다. 이론과 현실의 차이를 실감하고, 당황과 보람과 기쁨과 씁쓸함이 공존했던 시간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알게 했다. 또 내가 아동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깨닫게 했다. 모자라고 서투른 치료사를 좋아해준 아동에게 고마웠다.
혼자 짬짬이 했던 돈 공부의 기록은 네이버 애드포스트라는 결과물을 가져왔다. 치킨을 2번 시켜먹을 수 있는 금액을 벌었다. 지금도 1원, 10원 작고 소중한 수익금이 자라고 있다.
욕하면서, 모멸감에 울면서, 사직서 품고 다니면서 쌓은 직업상담사 경력은 훈련교사 3급 연수 선발로 돌아왔다. 노는 대신 선택한 주말 연수가 하루 종일 진행돼서 출근 안하는 토, 일요일에 더 일찍 일어났다. 왜 나는 사서 고생할까? 의문을 가지면서 수업시연하고, 시험보고, 직업상담 강의를 할 수 있는 훈련교사 자격증이라는 결과물을 얻었다. 연수 기간에 만난 짝꿍 쌤과의 인연은 생각에도 없던 소개팅이라는 결과를 불러왔다.
착한데 호구는 아니어서 자기 건 챙길 수 있는 사람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
성실하고 자본주의를 이해할 지적능력이 되는 사람
평생 비흡연자 등등(이렇게 12줄이나 적어뒀다. 이러니 연애를 못했지-__-)
인프제(INFJ)는 다 이상형 이렇게 상세하잖아, 나만 그런 거 아니잖아? 외치고 싶지만 주변에 인프제가 없다. 이상형도 복잡하고, 한번 보고 아니면 거절하고, 낯선 사람과 밥도 편하게 못 먹어서 위장약 먹고 소개팅 나간 적도 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낯선 남자 앞에서 편하게 밥을 먹었고, 그 남자와 세 번째 식사를 같이했던 크리스마스에 첫 연애를 시작했다. 낯선 남자였다가 지금은 친해진 이 남자는 알고 보니 예전 일기장에 적어둔 이상형의 12문장 중 10문장이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저질러 놓은 일이 많아서 직장+학업+연수에 남자친구까지 더해져서 잠시 논문을 잊고 지냈는데 점점 5학기가 다가오자 마음이 조급했다.
마지막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주제를 새로 잡고 논문을 준비했다. 교수님은 바쁘셔서 연락부터 쉽지 않았다. 나는 교수님을 짝사랑하는 사람이다. 자기최면 걸면서 연락드리고, 연락이 씹혀도 또 연락드리며 논문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동기선생님과 논문에 덤벼들다가 '우리 때려치울까요?' 하는 양가감정을 느끼며 정신없는 상반기를 보내고 논문을 완성했다. 최종 도장을 받고, 도장 찍힌 인준지를 들고 신나게 인쇄소로 달려갔던 늦은 밤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투덜대고, 짜증내고, 때려 칠거야! 하면서도 내심 바라던 결과물이 올 거라는 걸 알아서 다시 한발, 한발 나아가는 시간을 보냈다. 중간 중간 어김없이 시련은 찾아왔지만 이제는 면역이 돼서 제법 잘 일어선다.
별 것 아닌 일에 세상 무너진 것 같이 예민하게 굴고, 혼자서 많은 생각에 잠기느라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놓치고, 가난을 벗어나려 찌질하게 산 20대의 고군분투로 얻은 회복력 덕분이다.
예전 한국나이 서른에 입학(2021)한 대학원을 또 한 번의 서른을 맞이한 8월에 졸업한다. 두 번째 서른인 지금은 상담사로 새로운 시작을 열게 되겠지. 논문을 통해 배운 건 하나다. 어떤 일이든 끝은 오고, 나는 내가 한 일에 끝이 올 때까지 책임지고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는 것. 그걸로 5학기는 충분한 경험이었다.
만나이로 공짜로 얻은 것 같은 2년의 시간동안 나를 조금 더 알게 됐고, 조금은 자랐다. 그 성장통이 반가워 나는 앞으로도 여러 일을 저질러 볼 생각이다. 인생이 가져오는 결과는 꽤나 재미있으므로.
*종종 사람들이 박사도 가? 물어본다. 저는 이제 학교 쪽으로 침도 안 뱉고, 고개도 안 돌릴 거예요! :D